조선의 마지막 유학자 김황 선생
日 강점기 제1차 유림단 사건 등

진주시 본성동에 위치한 봉남서원 전경.
진주시 본성동에 위치한 봉남서원 전경.

 

 

지난 호에서는 진주성 내에 산재되어 있는 여러 주련들 중에서 촉석루 주련과 영남포정사문루의 주련의 내용을 작가의 행적과 두 누각의 문화재적 역사성 중심으로 기술해보았다.

본 호에서는 진주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진양(진주) 정씨 은열공파 대종회 재실이 있는 청계서원(淸溪書院) 내의 경덕사(景德祠) 주련을 찬(撰)한 중재(重齋) 김황(金榥)의 행적과 본 서원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소위 봉남서원(鳳南書院) 주련(柱聯)을 소개하고자 한다.

鳳南書院 柱聯

鳳山盤屹仰止彌高 우뚝 솟은 비봉산 우러러 볼수록 높고,

藍水澄淸源來有自 맑은 남강 물 맑은 근원 있기에 쉼없이 흘러내리네.

天運物生一條理直 만물을 생성하는 하늘의 이치 올 곧아,

地靈人傑萬古名流 영험있는 이 땅에 만고 인물 이어가네.

采蘋羞藻明信焉先 선대 제사 고기 나물로 잘 모시니 그 정성 정말 믿어 우니,

說禮敦詩淳風可挽 시와 예를 가르쳐 좋은 풍속 이어가네.

循厥詒謨維其篤矣 후손들 위한 좋은 업적 남김이 그렇게도 돈독하고,

昭玆來許敢不敬歟 이어 온 일 소상하니 어찌 감히 존경치 않으리오.

外裔孫, 聞韶 金榥

※ 상기 주련은 다른 주련에서 보기 드문 “8언”으로 되어있음.

◆註①◆

- 鳳南書院(봉남서원): 이 서원은 고려시대 나라를 지켜 낸 은열공 관정 정 선생(殷烈公 官亭 鄭 先生)과 목면(木棉) 씨를 길러내어 모든 백성들에게 따뜻한 무명옷을 입게 한 퇴헌 정 선생(退軒 鄭 先生)을 모시고 배향(背向)하는 곳이고 또 한편으로는 후진들을 가르치려고 강론(講論)하는 곳이다.

◆註②◆

- 外裔孫(외예손): 외가로 먼 후손

- 聞韶(문소): 경북 의성에 있는 지명

 

중재 김황 선생은 한주학파의 주리학 학통을 정립한 대유학자이며, 또한 1919년 3월에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 교육자이자 진정한 애국자였다. 사진은 1928년 산청군 산청군 내당촌으로 이사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했던 내당서당 전경.
중재 김황 선생은 한주학파의 주리학 학통을 정립한 대유학자이며, 또한 1919년 3월에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 교육자이자 진정한 애국자였다. 사진은 1928년 산청군 산청군 내당촌으로 이사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했던 내당서당 전경.

 

 

한주학파 주리학 학통 정립한 大 유학자

면우집 간행 독립운동자금 적극 모으기도

 

이어서 상기 주련이 기록되어 있는 청계서원(淸溪書院)(현 진주시 남강로 626번지 남성동)에 대해서 기술해 본다면, 이 곳 청계서원은 고려 병부상서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신열(鄭臣烈) 선생과 고려 공민왕 13년(갑진년) 봄, 이 땅에 목면씨앗을 처음 심어 그 중 한 알을 살려 크게 번성시키고 씨아와 물레 그리고 베틀을 창제하여(고려사, 태조실록) 온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베옷을 입힌, 고려 공민왕 때의 전객령판부사(典客令判府事)로 치사(致仕)하신 진양군 문충군 퇴헌 정천익( 鄭天益) 선생을 모신 곳이다.

조선 순조 33년에 영호남 유림들이 선생에 대한 보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진주 서쪽 대평면 마동 남강변에 청계서원을 세웠더니 예조에서 해마다 춘추로 관원을 보내 생폐와 향촉을 봉진했던 사림들이 봉사해 오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61년 후손들이 이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하고, 봉남서당이라는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정부의 도움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숭은사와 전사청을 재건하고,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여 매년 음력 3월15일에 두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다음은 상기 주련을 찬(撰)하신 중재(重齋) 김황(金榥) 선생의 행적을 살피기로 한다.

중재(重齋) 김황(金榥)(1896년-1978년)은 본관이 의성(義城)이며 자는 이회(而晦), 호는 중재(重齋)이다. 일명 우림(佑林)으로도 불리며 동강 김우옹의 후손이다. 그의 부친은 유학자였던 매서(梅西) 김극영(金克永)이다.

경남 의령 어촌리에서 출생하여,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아버지를 따라 경남 산청 황매산자락 만암(晩巖)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여 학업에 전념했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 심즉이설[心即理說)] 바탕의 도학)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명을 떨쳐 그 학통을 계승했다. 1919년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했다가 김창숙(金昌淑)을 만났고,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떠난 후 일본경찰에 발각,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1926년 동문들과 『면우집(俛宇集)』을 간행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적극적으로 모으기도 했다. 1928년 산청군 산청군 내당촌으로 이사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하여 그후 50년간 1000여 명의 문도(門徒)를 배출하고, 8·15 광복 후에도 대학생과 교수들이 몰려와 내당서사(內塘書舍)는 한때 전국유림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결국 중재 김황 선생은 한주학파의 주리학 학통을 정립한 대유학자이며, 또한 1919년 3월에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 교육자이자 진정한 애국자라고 볼수 있다. 그의 유명한 저서로는 『면우집(俛宇集)』, 『쇄기(瑣記)』·『효경장구(孝經章句)』, 예학(禮學)에 관한 『사례수용(四禮受用)』, 역사에 관한 『동사략(東史略)』·『역년도첩록(歷年圖捷錄)』·『독립제강(獨立提綱)』·『환영대조(寰瀛對照)』(연표), 시문집인 『익붕당총초(益朋堂叢鈔)』, 그리고 『일기(日記)』 등이 있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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