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부정 저항·비판의식 담겨져
부정에 과감히 맞서는 강인한 성격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 위치하고 있는 김종직 선생의 생가 ‘추원제’ 전경.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 위치하고 있는 김종직 선생의 생가 ‘추원제’ 전경.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도 ‘촉석루에서 교은의 시를 모방하다<矗石樓效郊隱>‘ 라는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高樓明月梅花時 높은 누각 밝은 달 매화꽃이 필 때에

造物撩我拚一詩 조물주가 내 흥취 돋워 시 한 수를 내놓게 하네.

銜巾靑鳥集錦筵 수건 물은 청조가 비단 자리에 모이니

醉興未覺繁華衰 취흥에 번화함이 쇠한 걸 깨닫지 못하도다.

光風泛溢蘼蕪渚 풍광은 향초의 물가에 넘쳐흐르는데

渚邊楊柳斜陽遲 물가의 수양버들엔 석양빛이 더디구려.

欄干倚遍望雲海 난간에 기대어 구름바다를 두루 바라보니

鐵笛暗和飛瓊詞 철적 소리가 은연중에 비경사를 화답 하누나,

丹丘何處擬可到 단구의 어느 곳도 이를 수가 있는지라

鏡中不怕霜毛垂 거울 속에 흰 털 드리운 게 두렵지 않다오,

牋與天公拍手笑 하늘에 전문 올리고 손뼉 치며 웃으니

傍人爭道一段奇 옆 사람들 다투어 일단의 기이함이라 말하네.

海上曾聞第一區 일찍이 바닷가 제일가는 구역이라 들었더니

春風來倚仲宣樓 봄바람 속에 찾아와 중선루에 기대었네.

自嫌塵土迷淸賞 속인이 청상에 어두움을 스스로 혐의하지만

豈有湖山負勝流 어찌 강산이야 승류를 저버릴 수 있으랴.

故故梅花迎酒笑 때때로 매화는 술을 맞아 웃는 듯하고

關關屬玉向人浮 울어대는 촉옥새는 사람을 향해 뜨누나.

白雲東望庭闈近 동으로 흰 구름 바라보니 정위가 가까워라.

不用閑愁滯遠州 한가히 시름하여 먼 고을에 지체할 것 없네.

◆註◆

① 청조는 선녀(仙女)인 서왕모(西王母)의 시녀(侍女)를 이른 말로, 여기서는 바로 수건을 든 미인(美人)들을 비유한 것임.

② 중국 당나라 허혼(許渾)이 노래한 허비경(許飛瓊)의 신선세계.

③ 신선이 사는 곳.

④ 하늘에 전문 올리고: 하늘에 축원(祝願)을 하거나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을 의 미한 말인 듯하다. 송(宋) 나라 때 육유(陸游)의 독사유감시(讀史有感詩)에 “머 리 숙이어 세상 일에 나가고 싶지 않고 전문 지어 하늘에 올리고 싶지도 않네 오직 술이나 실컷 마시고 취해 죽어서 수많은 산 깊은 곳에서 솔바람소리나 들 어야지[不肯低頭 就世事 亦不作牋與天公 惟須痛飮以醉死 亂山深處聽松風]” 한 데서 온 말이다.《劍南詩藁 卷四十三》

⑤ 두보(杜甫)의 시에 나오는 악양루(岳陽樓)를 말함.

누각의 이름. 중선(仲宣)은 삼국 시대 왕찬(王粲)의 자인데, 그가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지해 있을 적에 누각에 올라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데서 온 말이다.

⑥ 매우 맑고 깨끗함.

⑦ 매우 편안함을 의미.

⑧ 물새 해오라기의 일종.

⑨ 부모가 거처하는 집, 즉 자기 집.

 

진주시 남강로 626에 위치한 촉석루 전경.
진주시 남강로 626에 위치한 촉석루 전경.

 

 

상기 시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진주 촉석루에 와서 지은 시로써 그 제목이 <矗石樓效郊隱> -촉석루에서 교은의 시를 모방하노라-라는 매우 보기 드문 장시(長詩)이다. 그렇다면 조선초기의 대학자로 절의(節義)와 도학(道學)을 중시하는 선비학자였던 그는 수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으며 또한 신종호(申從濩)와 함께 《동국여지승람》의 편차(編次)까지 담당했던 뛰어난 대학자였다.

그토록 뛰어난 문재와 학문을 갖춘 그가 다른 곳도 아닌 이곳 진주에 와서, 더욱 그는 뛰어난 창작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대 고려 말의 본 지역출신인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의 작품을 모방하여 시를 지었다는 사실에 우리 후대인들은 매우 의아해하며 크게 놀라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이오(鄭以吾)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젊어서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의 문인들과 교유하였고 노후에는 성석린(成石璘)·이행(李荇) 등과 교유하였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교은집」, 「화약고기(火藥庫記)」가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찬성사 신중(臣重)의 아들이며 1374년(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우왕 2년) 예문관검열이 된 뒤, 삼사도사, 공조·예조의 정랑, 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년)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고, 1398년 9월 이첨(李詹)·조용(趙庸) 등과 함께 군왕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리고, 곧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다. 1398년 조준(趙浚)·하륜(河崙) 등과 함께 「사서절요(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였다.

이렇게 진주에 상기와 같은 유명한 시를 남긴 김종직은 또 과연 누구인가? 그는 조선조 초에 여러 방면에 뛰어난 인물인바, 그의 인적사항이나 행적은 다양하고 심지어는 파란만장했다. 그리하여 그의 모든 행적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고 중요한 인적사항과 업적만을 기술해본다.

김종직 그는 한마디로 진정한 큰 선비이다. 글을 잘 지어 당대에 문명(文名)이 높았고, 그의 글 역시 예사로운 필치가 아니었다. 부정을 보면 무섭게 비판하여, 그 비판의 대상이 그의 글을 보면 누구든지 큰 분노를 느낄 정도로 냉엄했다.

먼 후일 크나큰 문제가 되었던 그의 “항우의 손에 죽은 초나라 의제(義帝)를 기린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왕이 된 세조를 겨냥한 글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당시의 제왕들 또한 그 모두 김종직에게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후일 역사적 큰 파장을 몰고 오게 된다. 연산군은 김종직의 글을 보고 격하게 분노하여 그의 묘를 파서 목을 다시 베게 했다. 이른바, “부관참시(剖棺斬屍)”였고, 곧이어 김종직 문하의 제자들까지도 모두 처형했다. 그 사건이 바로 “무오사화(戊午史禍)”의 시작이며, 그들 외 다른 수많은 선비들도 폭군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김종직 자신도 27살, 젊은 시절에 지은 글이 이와 같은 무서운 파장을 몰고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결국 그의 이런 정신과 행동은 당시 무소불위의 왕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은 진정한 선비로서 그 어떤 형태의 부정에도 과감히 맞서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출중한 학자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진주 촉석루와 관계있는 그의 두 작품 즉, 자기 고향 밀양 영남루에 대한 <嶺南樓下泛舟>와 울산의 <太和樓>를 읊은 그의 시문을 읽어보기로 한다. 당시 영남의 삼대누각(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울산 태화루)은 삼남지방에서는 뛰어난 세 누각으로 그들 누각의 역사성, 예술성 그리고 빼어난 주변 경관 등이 특출하여 고려·조선 양조에 걸쳐 전국적인 수많은 문객들이 가정 선호했던 유람지로써 그 명성이 자자(藉藉)했다.

우선 그의 <嶺南樓下泛舟: 영남루 아래 배를 띄우다>를 보면:

檻外澄江百頃雲 난간 밖의 맑은 강, 수많은 줄구름 아래 흐르고,

畵船橫渡皺生紋 그림배 횡단하니 주름살무늬 생기누나.

晩來半醉撑篙看 저물녘에 반쯤 취해 상앗대를 버티고 보니,

兩岸靑山更十分 양쪽 언덕 푸른 산이 너무도 뚜렷하구나.

- 太 和 樓 -

黃龍淵上蜃氣樓 황룡연 위에는 신기루가 나타나고

神鶴城頭樹已秋 신학성 머리에 나무 이미 가을이구나.

嘯詠自慚叨盛府 시 읊으니 절로 성부에 있는 건 부끄러우나.

登臨聊喜托名流 누에 오르니 명류에 의탁한 게 너무 기쁘구나.

濛濛晩靄迷魚市 자욱한 저녁 안개는 어시(장)에 희미하고,

咽咽寒潮落蚌洲 마구 치는 찬 조수는 갯벌에 떨어지네.

不向壁間揮醉墨 벽간(을) 향하여 술 취한 붓 휘두르지 않는다면,

誰知跌宕二年遊 그 누가 2년 동안 질탕하게 놀았던 것을 알리오?

◆註◆

⑩ 울산의 학성동에 있는 성 이름.

⑪ 관청을 말함.

상기 김종직의 두 작품은 그가 영남삼대누각을 유람 중에 지은 시문들의 시제나 시의(詩意)는 그들 삼대누각의 공통적인 깊은 역사성, 뛰어난 예술성 그리고 아름다운 주변 승치(勝致)에 대한 기술(記述) 그 모두가 진주 촉석루를 표본으로 표현되었으며, 공통적인 시의는 대부분 주흥풍류(酒興風流)로 김종직이 시대적 부정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식이 가득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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