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건립배경·공사규모 등
애향애국심 담아 상세히 설명

진주성 내 건립돼 있는 촉석성문기.
진주성 내 건립돼 있는 촉석성문기.

 

지난 39호에서는 하륜(河崙)의 촉석루 사랑이라는 주제로 기술했는데, 주로 그의 고향사랑에 대한 참모습이 지금까지도 절절이 담겨있는 진주사랑 이야기인 두 작품 즉, <촉석루기>와 <촉석성문기>중에서 <촉석루기>에 관한 역사성과 작품성을 그의 인물론과 함께 기록해 보았다.

두 작품 중, 오늘 본보에서는 그의 <촉석성문기>에 대한 내용과 형성과정 그리고 그의 진심어린 애향심에 대해서 논급하기로 하고 나머지 <촉석루기>에 대한 상세한 번역이나 해설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이미 알다시피 고려말·조선 초기를 거쳐 진주에서 인생을 보낸 하륜은 진주성, 촉석루 등에 기문(記文)을 지어 진주의 역사적 경관에 관한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촉석성문기(矗石城門記)>로 촉석성은 지금의 진주성을 의미한다.

그 성을 왜 쌓아야 했는지, 어떻게 그 공사가 이루어졌는지, 그 규모는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그의 애틋한 애향심과 애국심을 담아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의하면 그가 총각시절에는 성벽은 무너져 그 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고려(高麗)말에 왜구가 날로 심해지므로 “정사년(고려 우왕 3년:1377) 가을에 조정에서 변방을 방비하는 것을 중히 여겨,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어 주(州)·현(縣)의 성(城)을 수리케 하였다. … 기미년(1379) 가을에 지밀직 배공(裵公:裵克廉)이 강주진(康州鎭)에 와서 목관(진주목사 金仲光)에게 공문을 보내어 촉석성을 다시 수축하게 하고, 참좌를 보내 공역을 감독하였다. 흙덩이던 것을 돌로 바꿔서 쌓게 하였으나, 공역이 반도되기 전에 왜구(倭寇)에게 함락되었다.… 왜구가 물러간 뒤에 목사 김공이 민정에 따라 영을 내리기를 ‘주(州)의 성(城)을 이제는 수축해야겠다’ 하니 듣는 자가 다 역사하기를 원하였다. 장정에게 역사를 고르게 하고, 몸소 감독하여 며칠 안 되어 완성하였다. 성의 둘레는 8백보이고, 높이는 세길이 넘었다.… 성(城)이 완성되자 왜적이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그의 <촉석성문기>의 전체 원문과 해설부분을 기술함으로써 그의 애국·애향·애민의 진정성을 인식하도록 한다.

矗 石 城 門 記

自古以來,理亂循環,盖其,天數之盛衰。人事之得失,相因而然也。古之人,修人事,以應天數,故寇亂或興,而終莫能爲患也。余於吾鄕之城有感焉。余昔總角之日,遊學於此,每見城塹之遺基,不知其歲月問之耆舊,亦莫是徵,當時閭閻,熙熙烟化,相望海寇之鼠竊者,雖或間發,康州吉岸之伐,亦足以摧挫,而合浦之鎭,分兵相救,若雷勵,而風飛然,人不知修城塹爲急務也。

余,旣冠從,宦十餘年來冠之登陸者歲益深,在丁巳之秋,廷議重備,邊遣使諸道分,理州縣之城。鄕人即舊基築,以土不能經久,隨復頹圯,奉使者豈得辭其責,己未秋今知密直,裵公來鎭康州,移牒牧官,俾復修之,遣參佐督其役,易土以石功未半而寇陷,頼江城郡之山城一鄕人有所依據得,以却寇鋒,然城狹而高,不能以容衆又去州理遠,倉卒勢不能,及寇旣退,牧使金公,因民情,而出令曰州之城,今可以畢修矣。聞者咸願爲之役於是丁均其役,躬自監督,不日而畢,域周八百步,高三仞有奇置門三西曰義正,北曰智濟,南曰禮化,皆樓其上焉。登而四顧則菁川繞于西,長江奔于南,品字隍列於東,三池匯其北,又開塹于城池間,自西而東折,而又南以至于江,形勢之勝,固可以一當百矣。城旣成矣。冠不復敢近而一境, 賴而安鳴呼。作之之難,不如興復之爲難,有始之難,不如有卒之爲尤難也。事半而功倍者,余於金公見之矣。公諱仲光,爲政務大體,有長者風,嘗爲濟州牧,反側之俗服其義,及還朝宰相,以能理劇擧,故有是任,判官,李君任忠,亦端人也。助公以成。

-晉山 河崙-

 

하륜 선생은 '촉석성문기'를 통해 성(成)의 모양과 구조 그리고 성을 쌓는 동안 관리와 백성들의 노고, 성벽의 보수와 완성에 대해 기록했다. 사진은 진주시 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 전경.
하륜 선생은 '촉석성문기'를 통해 성(成)의 모양과 구조 그리고 성을 쌓는 동안 관리와 백성들의 노고, 성벽의 보수와 완성에 대해 기록했다. 사진은 진주시 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 전경.

 

 

성이 완성되니 왜구가 가까이 오지도 못하여…

성 모양·구조·백성 노고·성벽 보수 등록

“城 둘레가 팔백보·높이는 스물 넉자”

 

 

【 전체 역문: 옛날부터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되풀이되는 것은, 대개 그 하늘 운세의 성함과 쇠퇴함의 이치와 사람 사는 일의 성공과 실패가 서로 인연이 되어 그러한 것이다. 옛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할 일을 닦음으로써 하늘의 운수에 응하였기 때문에, 도둑떼에 의한 난리가 혹시 일어나더라도 끝내는 능히 우려함이 되지 않게 하였다.

나는 우리 고향의 성(成)에서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내가 옛적 총각이던 시절에 여기서 유학하며 늘상, 성 둘레 구덩이의 남겨진 빈터를 보았으되 그 오래됨을 알지 못했고 나이 많은 어른에게 여쭈어 봐도 또한 능히 알 수가 없었다. 이 무렵엔 백성들의 살림집들이 오순도순 즐겁게 모였고, 밥 는 연기가 서로 어우러졌었다. 바다로 침입해온 도적 떼의 좀도둑질이 비록 어쩌다 가끔 일어났으나 강주(현재:예하리)와 길안의 토벌로써도 또한 적을 꺾어 쳐부수기에 넉넉하였다.

합포의 전에서 전사를 나누어 서로 구원하면 우레처럼 엄하게 바람같이 몰아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참(成塹)을 수리하는 일을 급한 임무로 알지 않았다.

내가 이미 갓을 쓰고 벼슬에 종사한지 십여 년인데 바다건너 도적떼들이 뭍으로 올라오는 일이 해마다 더욱 늘어만 갔다. 정사년 가을에 조정의 의논이 국경지대의 방비를 소중히 여겨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 주와 현의 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곧 옛터에 흙으로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흙담이 무너지니 임무를 맡았던 자가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기미년(1379년) 가을에 지금 지밀적 이었던 배공이 강주의 진장으로 와서, 이곳 강주목의 관리에게 위로부터의 지시사항을 알려 다시 이를 쌓게 하였다. 참좌를 보내어 공사 일을 감독케 하며 흙을 바꾸어 돌로써 쌓게 했는데 일이 채 반도 못 되어서 왜구에게 함락되었으나 강성군의 산성에 의지하여 고을 사람이 거기서 거처한바 있었고 도적떼의 칼날을 물리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이 비좁고 지세가 높아서 많은 사람을 들여 넣을 수 없고, 또 주(州)의 마을에서 거리가 멀므로 미처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몹시 급작스러울 때는 거기까지 능히 가 닿을 수가 없었다. 왜구가 물러간 뒤에 목사 김공께서 백성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영을 내려 고을의 성을 이제 쌓고 수리하여 마칠 수 있도록 하라 이르니, 듣는 자가 모두 그 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장정들에게 부역을 고르게 하고 몸소 감독하여 며칠이 안 되어 끝나게 되었는데, 성의 둘레가 팔백 걸음, 높이는 스물 넉자가 넘었다. 기이하게 문을 세 개 설치하니 서쪽은 의정문이라 부르고, 북쪽은 지제문이며, 남쪽은 예화문이라 했는데 모두 그 위에 다락을 만들었다. 올라가서 사방을 돌아보고 청천(남강의 옛 이름)이 서쪽을 빙 둘렀고 긴 강이 남쪽에 흐르며 품자 모양으로 생긴 못이 동쪽에 벌려있고 세 군데 못은 그 북쪽에서 물이 돌아 흘러 모인다. 또 구덩이를 성지(城地) 사이에 파서,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꺾어 또 남쪽으로 가서 강에 이르게 하였다. 형세가 뛰어남이 진실로 성 위의 한 사람이 성 밖의 백 사람을 가히 당해낼 만하였다.

성이 완성되니 왜구가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하여 모든 환경이 믿음직하고 편안하였다. 아! 만드는 어려움이 다시 일으켜 세우는 어려움만 못하고, 시작이 있는 어려움이 더더욱 끝맺음이 있게 하는 어려움만 같지 못한 것인데, 일한 것은 반이면서 공로의 업적은 곱절이 되는 것을 내가 김공한테서 보았도다. 공의 휘는 중광이니 고을과 백성을 위한 정우에 힘써서 대체로 덕이 뛰어난 웃어른다운 바탕이 있었다. 일찍이 제주목사가 되었을 때, 곧잘 두 마음을 품고 옳은 것을 따르지 않던 그 지방 습속이 그의 외로움에 감복하였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다스림에 능하다 하여 재상들이 바삐 천거하여 여기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판관이었던 이군 임충(任忠)도 역시 단정한 사람으로서 김공을 도와 이 성을 완성시켰다. 】

 

위에서는 하륜의 <촉석성문기> 전체 원문과 번역을 소개하였다. 이어서 상기 <촉석성문기>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기로 한다.

 

이 기문의 주된 내용은 성(成)의 모양과 구조 그리고 성을 쌓는 동안 관리와 백성들의 노고, 성벽의 보수와 완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예전에는 살기 좋았던 마을에 언제부터인가 해적과 왜구의 침입이 잦아졌다. 그들을 막기 위해 토성을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였다. 결국 1379년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도 왜구가 쳐들어와 절반정도만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 총각시절 이곳에서 놀며 학문을 익히고, 항상 성 주변을 돌며 살펴도 축성연대를 알 수 없었다. 주변의 나이든 노인들에게 물어봐도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후 정사년(丁巳年, 1377)에 조정의 논의에 따라 고을 사람들이 옛 성터에 흙으로 성벽을 쌓았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후 기미년(1379년) 가을에 다시 쌓아서 도적떼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 뒤에 진주목사 김중광(김仲光)이 주도하여 성벽을 다시 보수하고 완성하였는데, 성의 둘레가 팔백보이며 높이는 스물 넉자가 넘었다.”라고 되어 있다.

앞으로 이후부터는 하륜의 <촉석루기>를 이처럼 상세하게 번역하고, <촉석성문기>와 더불어 보다 심도있게 연구하여 그 내용을 모든 이에게 알림으로써, 우리 진주출신 하륜 선생의 애국·애향심이 보다 확실하게 공인될수 있음을 확신하는 바이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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