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2002년 각각 복원
‘충절의미’ 공북문이 정문
두 손 모으고 북쪽을 향한다
‘화재 예방’ 청룡·황룡 그림도

공북문은 북쪽의 임금께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굳이 진주성 문을 두고 정문과 후문을 따지자면 진주성은 공북문이 정문이고 동쪽에 있는 촉석문이 후문인 셈이 되는 것이다. 사진은 공북문 전경.
공북문은 북쪽의 임금께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굳이 진주성 문을 두고 정문과 후문을 따지자면 진주성은 공북문이 정문이고 동쪽에 있는 촉석문이 후문인 셈이 되는 것이다. 사진은 공북문 전경.

 

 

지난 38호와 41호에서 하륜의 「촉석루기」와 「촉석성문기」를 중심으로 하륜의 애틋한 진주 사랑과 촉석루 사랑을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는 하륜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진주성의 출입구였던 촉석문과 공북문의 설립과정, 문화재적 가치 그리고 그 복원과정에 대해서 기술해보고자 한다.

우선 진주성 두 개의 문인 촉석문과 공북문의 역사성이나 문화재적 가치를 살피기 전에 타 지역 성곽의 문에 대해서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하여 우선 서울의 왕성(王城)으로써 사적 제117호인 경복궁(景福宮)의 설립과정과 문화재적 가치를 고찰해보면, 설립연대는 조선조 태조4년 1395년이며 면적은 약 43만평으로 진주성 촉석루보다는 무려 155년 정도 늦게 설립되었고 그 면적은 진주성 면적의 거의 9배가 된다. 그러나 그 문화재적 가치는 똑같이 사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리고 경북궁에 설립된 문은 진주의 진주성과 비슷하게 4개의 문, 즉 광화문(光化門), 신무문(神武門), 건춘문(建春文) 그리고 영추문(迎秋門)으로 명명되어 있다.

동시에 각 문의 이름에 따라 포함된 의미로 우선 광화문은 “빛이 세상을 덮고 교화(敎化)로움을 만방에 떨친다.”는 뜻이고, 다음 신무문(神武門)은 천정에 현무(玄武) 즉 “거북과 뱀의 형상”이 그려져 있으므로 신무(神武)라는 뜻이며, 문자체를 신격화(神格化) 시킨 의미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건춘문(建春門)은 “복과 희망과 생동”의 의미로 지어진 문이고, 끝으로 영추문(延秋門)은 “대대로 태평성대를 기대한다.”는 의미를 품고 지어진 이름으로 나타나있다.

그 다음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水原) 화성(華城)은 조선22대 정조(1796년)가 정약용의 기술서를 바탕으로 건설한 18세기 당시 동아시아 성곽을 대표하는 빼어난 건축물로 사적 제3호이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수원화성은 그 성 자체의 문화재등급이 사적이지만 사실 그 성안에 설치된 11개의 문의 문화적 가치가 더 높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화성 내에 있는 팔달문(八達門)은 보물 402호이고 화서문(華西門)은 보물 403호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국적인 성곽의 문이 갖고 있는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 진주의 촉석문과 공북문의 역사성이나 문화재적 가치는 무엇이며, 어느 수준인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그리하여 우리 지역의 진주성 내에 촉석문과 공북문에 대한 역사성이나 문화재적 가치를 알 수 있는 고전자료를 살피기로 한다.

두 문, 즉 촉석문과 공북문 중에서 어느 문이 정문이며, 어느 문이 어떤 의미와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향후 우리 진주의 문화관광 홍보와 지역 역사인식에 큰 도움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이 보고 있는 촉석문과 공북문의 복원과정은 어떠했는지를 살피기로 한다.

 

사진은 촉석문 전경.
사진은 촉석문 전경.

 

 

진주성의 동문인 촉석문은 1972년에 복원되었고 1975년에는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철거하는 정화작업이 시작되었으며, 북쪽 편에 있는 현재의 공북문은 2002년에 복원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북문을 진주성의 후문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공북문 복원이 뒤에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일반 민가에서 대문을 북쪽으로 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성문(城門)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후문이니 정문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방향을 염두에 두고 ‘동문’ 또는 ‘북문’이라 하거나 문에 걸려있는 편액을 보고 그 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마땅하다. 문을 지칭하는데 있어 일반적으로 ‘정문’과 ‘후문’이라 함에, ‘후문(後門)’이 있으면 ‘전문(前門)’이라 해야 옳은데 ‘정문(正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 가정 먼저 정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른 문은 ‘광화문(光化門)’이다. 궁궐의 남문은 원래 십이지의 하나인 ‘오(午)’가 정남향을 가리키기 때문에 오문이라 했는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다음,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성을 쌓아 문을 만들어 남쪽의 대문을 ‘정문((正門)’이라 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권 태조조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의 개국정도(開國定都)에 보면, 문의 이름에 대해 정도전(鄭道傳)은 태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其正門曰:天子諸侯,其勢雖殊,然其南,面出治則皆本乎正,蓋其理一也。

若稽古典,天子之門曰端門,端者,正也。今稱午門曰正門,命令政敎,必由是門而出, 審之旣允而後出,則讒說不得行,而矯僞無所托矣;敷奏復逆,必由是門而入,旣允而後入,則邪僻無自進,而功緖有所稽矣。闔之,以絶異言奇邪之民;開之, 以來四方之賢,此皆正之大者也。

“정문에 대해 아뢰오면, 천자와 제후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이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이다. 이제 오문을 정문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행하지 못하고 조작과 거짓으로 부탁하지 못할 것이며, 임금에게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은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서 윤허하신 다음에 받아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는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이다.”

즉, 정문이라는 이름에는 임금의 명령과 교지는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나가고, 보고나 상소 그리고 현명한 인재가 모두 그 문을 통해 들어오기 때문에, 나가고 들어 올 때 깊이 살피고 허락함에 있어서 반드시 정(正)에 본(本)을 둔다는 철학이 들어있다. 공북문(拱北門)은 글자 그대로를 보자면 두 손을 모으고 북쪽을 향한다는 뜻이다. 북은 임금을 의미하는데 이는 논어의 위정 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다음과 같다.

《論語》〈爲政〉

「爲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而衆星共之。」

- 공자가 말하기를 덕으로써 정치를 함은 마치 북극성, 즉 임금이 북극에 자리 잡고 있고 다른 별들(신하와 백성)이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

따라서 공북문은 북쪽의 임금께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굳이 진주성 문을 두고 정문과 후문을 따지자면 진주성은 공북문이 정문이고 동쪽에 있는 촉석문이 후문인 셈이 되는 것이다. 공북문을 들어서면 천정에 두 마리의 청룡과 황룡이 구름 속에 뒤엉켜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예로부터 용은 임금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용왕 먹인다는 풍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용은 물에 살기에 나무로 지어진 문루(門樓)의 화재를 예방한다는 벽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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