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나라에 인재를 공급했던 창고
진취적 능동적 기상을 가졌던 인재들
조선500년 영의정 우의정 넷씩 배출

진주성 내 영남포정사 옆에 있는 하륜의 기념비. "문충공 호정 하륜 선생 태지(胎地)"라고 적혀 있다. 사진=박청기자 
진주성 내 영남포정사 옆에 있는 하륜의 기념비. "문충공 호정 하륜 선생 태지(胎地)"라고 적혀 있다. 사진=박청기자 

진주는 과거 일천 수 백 년 동안 이 지역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고 갑오개혁 이후엔 경남의 도청 소재지이기도 했다. 진주는 예로부터 국지인재지부고(國之人材之府庫)라 해서 ‘나라에 인재를 공급하는 창고’로 불릴 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며, 또한 ‘조정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진주에 있다’라고 할 정도로 인재가 많았다. 인재들 중엔 특히 충절, 문화, 예술, 교육, 사상가 등 후세들의 정신적 모범이 되는 인물들이 많았다. 이 자리에서 언뜻 떠올려 봐도 충절의 고장 제1번지답게 고려 문하시랑 하공진(河拱辰 ?∼1011)선생, 거란의 10만 대군을 물리친 은열공 강민첨(姜民瞻 963∼1021), 여진족을 두만강 너머로 몰아내고 함경도의 국경을 다진 양정공 하경복(河敬復 1377∼1438)장군, 솔잎으로 눈을 찔리면서도 청맹(靑盲)을 자처하며 절조를 지킨 대사헌 정온(鄭溫), 단종을 보위하다 순절한 우의정 정분(鄭奔), 계사년 진주성 싸움의 삼장사인 최경회(崔慶會 1532∼1593), 황진(黃進 ?∼1593), 김천일(金千鎰 1537∼1593)과 논개(論介 ?∼1593), 죽음을 무릅쓰고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文益漸 1329∼1398)선생, 단성소를 올려 임금과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를 규탄한 남명 조식(1501∼1572)선생, 태종 재위 때 영의정을 지낸 하륜(河崙 1347∼1416), 그리고 청백재상으로 이름난 하연(河演 1376∼1453)선생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진주 인재들이 나라를 위해 그 올곧은 정신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것이다. 

이들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자유, 평등, 정의, 주체 정신 속에 학문과 문화 예술을 숭상했으며 시대를 정확히 예감하는 가운데 진취적이고 능동적 기상을 가졌다. 그러했기에 말보다 행동으로 곧장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들의 올곧은 정신을 물려받아 진주인은 자유와 평등, 학문과 문화 예술을 숭상하고 불의를 미워하며 정의를 사랑한다. 또한 시대를 정확히 예감할뿐더러 활달하여 늘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기상을 타고나 관망보다는 행동을,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고귀한 정신을 뿌리에 간직하고 있다.

조선 정조때 대사간을 지낸 윤행임(尹行恁 1761∼1801)은 각 도민성을 4자로 풀이했는데 경상도민을 일러 ‘태산교악 설중고송(泰山喬嶽 雪中孤松)’ 즉, 산악의 모습을 능히 바꾸고 차고 매서운 눈보라를 홀로 견뎌내는 소나무의 절개에 비유했다. 영조 때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은 경상우도인을 '낙선호의(樂善好義)’ 즉, 착한 일 하는 것을 즐겨 하고 의로운 일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과연 이 고장에 적절한 정신적 평가가 아닌가 싶다. 결국 이러한 지역에서 배출된 걸출한 인물들이 오늘날 진주정신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할 것이다.

 

◈ 조선조 500년 진주출신 정승 주요 공적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국무총리급인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이라는 정1품 품계가 있었다. 세 품계는 같은 정1품이지만 엄연히 서열이 있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순이다. 영의정은 조선 시대 의정부의 으뜸벼슬로 정치와 행정 일을 총괄하는 최고 지위였고, 좌의정은 의정부에 속해 모든 벼슬아치를 통솔하고 정치 및 행정상 일을 맡아 하던 벼슬이었다. 그리고 우의정은 영의정, 좌의정과 마찬가지로 정치 및 행정상 일을 봤던 정1품 관직이었다. 바로 이러한 관직에 조선 500년간 “영남 인재의 절반”인 진주 출신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 대표 인물 아홉 명을 살펴본다.

 

◇조선 최고의 중앙관직, 영의정

▶하륜(河崙) – 태종의 킹메이커

고려 말 조선 초기 문신. 정도전, 정몽주 같은 신진사대부들처럼 이색에게 학문을 배웠다. 고려 말 온건개혁파였던 그는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와 친구였던 덕에 태종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이후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끌며 태종의 킹메이커가 되었고 결국 영의정까지 지냈다. 하륜은 일흔까지 천수를 누려 두 왕조 아홉 임금 시대를 살고 일곱 임금을 섬겼는데, 그의 부고를 들은 태종은 몹시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하지 않고 7일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 전한다.

▶하연(河演) – 황희에 이어 영의정 지내다

조선 세종 때 문신인 하연은 139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해 대제학을 거쳤다. 1423년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채택 받은 그는 1449년 황희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1425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경상도지리지>를 편찬했고 그 서문을 썼다. 하연은 포은 정몽주로부터 학문을 사사 받고 성리학에 입문했다.

▶강맹경(姜孟卿) – 근엄하면서 너그러웠던 문신

강맹경은 조선 전기 문신이다. 1429년(세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벼슬을 두루 거치고 1448년 지승정원사, 1452년(문종 2)에는 도승지를 지냈다. 1453년(단종 1) 이조참판으로 있으며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을 도와 공을 세우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좌익공신 2등에 뽑혀 진산부원군에 봉작되었다. 이후 좌참찬을 거쳐 1457년(세조 3)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좌의정을 거쳐 1459년 영의정이 되었다 1461년 별세하였다. 강맹경은 평소 침착하고 너그러운 성품에 강직하고 근엄한 대신의 기품을 갖추었다 전해진다. 체격 또한 크고 훌륭했으며 의례와 법도에도 밝았다 한다.

 

지난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기증유물특별전 한양의 진주 류씨’에 전시된 류순정의 대형 전신상. 조선시대 한양의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 살던 명문가 진주류씨(晉州柳氏) 문성공파(文成公派)가 기증한 것이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지난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기증유물특별전 한양의 진주 류씨’에 전시된 류순정의 대형 전신상. 조선시대 한양의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 살던 명문가 진주류씨(晉州柳氏) 문성공파(文成公派)가 기증한 것이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류순정(柳順汀) – 사림파 출신 첫 공신 책록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1506년 중종 반정에 참여한 류순정은 사림파 출신으로선 처음 공신에 책록된 정치인이었다. 1487년(성종 18) 진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이후 연산군 때 홍문관과 삼사 요직을 거쳐 참판,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리곤 1506년 중종 반정에 가담해 일등공신이 되어 의정부 영의정과 청천부원군에 이르렀지만 동문 선후배들로부터는 외면당했다 전해진다. 류순정은 연산군 즉위 후 평안도절도사 전림(田霖)의 권력 남용을 추궁하고 사헌부헌납으로서 임사홍(任士洪)의 잔악함을 논박했으며, 야인 문제에 대한 대책을 올리기도 했다.

 

◇영의정의 전 단계, 좌의정

▶강로(姜㳣) – 대원군 측근 병조판서 지낸 좌의정

조선 말기 문신. 고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진주 강씨로서 강이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헌종 때 증광문과에 급제해 정자와 홍문관응교를 거쳐 철종 때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하지만 북인 계열에 속해 노론 중심의 세도정치에서 관직 승진 속도가 떨어졌는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남인계열과 북인계열을 중용해 강화도위유사와 대원군 측근인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까지 승진했다. 강로는 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의 처벌을 주장했다가 우의정 한계원과 파직당한 뒤 재기용되기도 했고, 임오군란 땐 난당과 작당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당했으나 곧 풀려 나와 1887년 사면되었다.

 

◇의정부 3정승 중 하나, 우의정

▶정분(鄭苯) – 토목에 조예가 깊었던 문신

문음으로 벼슬길을 시작했고 이후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세종 때는 우찬성까지 진급했다. 이후 문종이 승하하자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그 유지를 받들어 단종을 보필했다. 정분은 김종서의 추천을 받아 병으로 사직한 남지의 뒤를 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권력엔 관심이 없었고 문신임에도 토목에 조예가 깊어 왕실의 건물 건축이나, 제방공사 같은 토목공사를 손수 해냈다. 숭례문과 서산시 해미읍성이 바로 정분의 작품들이다.

 

진주 상대동 고분군은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진주 정씨(晋州鄭氏) 선조의 묘역이다. 조선 전기 우의정을 지내고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장공 정분 부부의 무덤을 비롯 진주 정씨 3대의 무덤 5기로 구성된 이곳은 경상남도 시도 기념물 제159호다. 사진=문화재청
진주 상대동 고분군은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진주 정씨(晋州鄭氏) 선조의 묘역이다. 조선 전기 우의정을 지내고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장공 정분 부부의 무덤을 비롯 진주 정씨 3대의 무덤 5기로 구성된 이곳은 경상남도 시도 기념물 제159호다. 사진=문화재청

▶강귀손(姜龜孫) – 연산군의 폐립을 도모하다

강귀손은 1479(성종10)년에 과거에 급제해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를 두루 거쳐 1496년(연산 2)년 도승지에 이르렀다. 1499(연산 5)년 한성부판윤으로 갔다 이듬해 도총부 도총관을 거쳐 이조판서가 된 뒤 우의정까지 올랐다. 만년에 작은 정자를 지어 장륙(藏六)이라 편액하고 뜻을 비추었던 그는 연산군의 황패(荒敗)가 날로 심해져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폐립(廢立)하려 신수근의 의중을 알아보려 했지만 뜻이 맞지 않아 모사가 누설될까 근심하던 차 끝내 등창이 나서 죽었다. 향년 56세였다.

▶유부(柳溥) – “가난한 백성을 돕는 것이 급선무”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시에 합격, 1501년(연산 7)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하지만 3년 뒤 홍문관박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복직돼 강원도도사를 지냈고, 1529년엔 첨지중추부사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자 시무책을 올려 진휼(賑恤, 가난한 백성을 도움-편집자주)이 급선무임을 강조했고, 시비를 밝혀 공론을 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사임했다가, 지중추부사를 거쳐 1533년 호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성균관동지사와 우찬성, 좌찬성을 거쳐 1537년10월 비로소 우의정에 올랐다.

▶강사상(姜士尙) – “국가 치란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강사상은 명종 1년인 154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문한직을 제수 받았다. 1557년 동부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우부승지를 거쳐서 우승지를 역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이때 재해에 대한 왕의 반성을 촉구하는 소를 올린 바 있다. 이후 도승지와 예조참의를 거쳐 1561년 왕의 특명으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다시 부제학이 되어 권신 이량(李樑)의 불법을 주장하다 이량의 미움을 받고 부호군(副護軍)으로 좌천되었다. 1564년 도승지로 다시 기용된 강사상은 1568년(선조 1) 대사헌으로서 사간 유희춘과 함께 조광조의 무죄를 주장했다. 1576년 우참찬을 거쳐 2년 뒤 우의정에 오른 그는 “국가의 치란은 천운에 있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며 정쟁에 초연한 입장을 취했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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