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한금화 이은 충절과 애국 정신
내무대신 이지용 요구 일언지하 거절

진주성 논개사당 시판에 적혀있는 산홍의 한시(漢詩). 사진=박청기자
진주성 논개사당 시판에 적혀있는 산홍의 한시(漢詩). 사진=박청기자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千秋汾晉義),

두 사당에 또 높은 누각 있네(雙廟又高樓),

일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羞生無事日)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笳鼓汗漫遊)”

 

위 시문은 남강변 논개사당에 걸려 있는 한 시판에 보이는 한시(漢詩)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이 시를 지은 이는 산홍(山紅)이라는 기생으로 천년 진주의 기개를 행동으로 실천한 또 한 명의 진주기생이었다.

◇역적의 첩을 거부하다

예로부터 진주기생은 조선 팔도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진주기생들의 가무(歌舞)는 조선 제일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 났으며, 정조(貞操)가 두텁고 순박함으로 그 명성 또한 높았다. 여기에 다른 지역 기생들이 갖고 있지 않는 나라사랑 정신까지 갖추고 있어서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이 그 애국실천 사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일제강점기 아래 을사오적 중 한명으로 권세와 재력이 막강했던 내무대신 이지용을 거침없이 희롱했던 사실이다.

“晉州妓 山紅, 色藝俱絶, 李址鎔以千金致之, 欲雖爲妾, 山紅辭曰, 世以大監爲五賊之魁, 妾雖賤倡, 自在人也, 何故爲逆賊之妾乎, 址鎔大怒撲之” 

즉, “진주기생 산홍은 외모나 재주가 모두 뛰어나,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그녀를 첩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산홍이 거절하며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들 하는데, 내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나 같은 사람도 스스로 사람구실 하는데 무엇 때문에 역적인 당신 같은 사람의 첩이 되겠는가’라고 하니, 이지용은 대노하여 그녀를 두들겨 팼다.” 어떤 과객이 이런 사실을 알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다투어 매국인에게 나아가 종처럼 아부하는 모습들이 날로날로 분분하구나, 그대의 집에는 금과 옥이 집보다 높게 쌓여 있는데도 산홍이라는 한 여인의 사람과 젊음을 사기도 매우 어려운 것 같구나!”라고 되어 있다.

◇‘세세연년’ 유행가로 이어진 산홍의 정신

당시로서는 글도 잘 짓고 외모까지 빼어난 진주기생 산홍이 그 권세가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의 대단했던 내무대신 이지용의 요구를 일언지하 거절하고 희롱까지 했다. 이 사건은 그 전대에 있었던 진주기생들인 논개나 한금화 등 애국실천 정신이 그대로 계승된 진주인의 충절과 애국정신의 전통이라 볼 수 있다. 산홍에 대한 황현의 이 기록은 1940년대까지 국민스토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 되면서 급기야 오늘날까지도 ‘세세연년(世世年年)’이라는 유행가 가사로 전해 오고 있다. 

“산홍아, 너만 가고 나를 혼자 버리기냐, 너 명복 비는 마음 백년을 변할소냐, 천년을 변할소냐, 한 세상 변할소냐......”

지금도 남강변 촉석루에 오르면 천추의 한을 품고, 불어오는 소슬바람 속에서도 어디선가 정말 여리고 약한 여인의 모습이지만, 그녀의 대쪽처럼 강인한 충절과 애국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남강변 의암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논개 순국 재현극. 사진제공=진주시

진주기생 만세사건으로부터 325여 년 전인 임진년(1592년)과 계사년(1593년).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1593년 6월29일 진주성이 왜군에 함락되어 약 7만여 명 군·관·민이 죽었으며, 소와 말, 개나 닭조차도 모두 도살됨으로써 세계 전사 상 그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말 그대로 참혹한 초토(焦土)가 자행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논개는 나라의 원수이며, 특히 낭군인 최경회 장군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낭군의 원수인 왜군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 마음을 다잡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기생 분장한 논개, 무쇠가락지 끼고 남강 투신

때는 1953년(선조25년) 7월7일. 왜군이 진주성 내 촉석루에서 승전연회를 열었다. 이에 논개는 왜군이 진주 전기생들에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사실을 알고서 자신을 기생이라 속이며 그 연회에 참석하였다. 기생복장으로 분장한 논개는 촉석루에서 술에 취한 왜군의 장수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 게야무라로구스께)를 촉석루 아래 강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위암(危巖)으로 유인해 두 팔로 그를 껴안고 급히 흐르는 강물에 함께 투신했다.

이 사건의 원문인 <징비록>에 보면 “官婢論介, 凝粧靚服, 立於矗石樓下, 峭岩之前, 其下萬丈直人波心, 倭見近而獨一倭挺然直進, 論介笑而迎之, 遂抱其倭直投于潭”으로 기록되어 있다. 논개는 두 손 열 개 손가락에 무쇠가락지를 끼었다. 혹 껴안은 왜군 장수를 놓칠세라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의암별제(헌무) 한 장면. 의암별제는 매년 음력 6월 길일을 택해 논개를 추고하기 위해 기생들만이 치른 대규모 의식이다. 악공을 제외한 모든 의식을 여자(기생)들이 주관하는 독특한 제전으로, 선비들의 음악인 정악(正樂)을 사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사진제공=진주시
의암별제(헌무) 한 장면. 의암별제는 매년 음력 6월 길일을 택해 논개를 추고하기 위해 기생들만이 치른 대규모 의식이다. 악공을 제외한 모든 의식을 여자(기생)들이 주관하는 독특한 제전으로, 선비들의 음악인 정악(正樂)을 사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사진제공=진주시

◇‘의암부인’ 논개 추모 150년간 이뤄져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했던 그 바위를 후세는 의암(義岩)이라 부른다. 그래서 논개를 일명 ‘의암부인’이라고 한다. 동시에 그를 위한 추모제 및 행사들이 지금의 의기사(義妓祠)와 남강 일원에서 무려 150년간 이루어지고 있다. 

논개에 대한 출신이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여러 설이 있으나 우선 그 생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사실과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영암군수로 있었던 최경회 장군의 부실(副室)로서 임란이 발생하자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남원, 무주 등지에서 크게 활동하다 진주성에 입성해 왜군과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성이 함락될 당시 논개는 그와 함께 진주에 머물고 있었는데, 얼마 후 진주성 밖에서 최경회 장군의 순절 소식을 접하고 나라의 원수이자 낭군의 원수인 왜군에 대한 적개심과 애국충절의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해 나약한 여인으로서 거룩한 구국실천을 결행하게 된 것이었다.

 

◈진주기생 만세사건 전국으로 번지다

  촉석루로 행진하며 '독립만세'

경남일보 창건자인 장지연 선생은 경남일보 1910년 1월7일자 칼럼인 ‘진양잡영(晉陽雜詠)’에서 당시 다른 지역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진주만의 독보적 캐릭터인 진양삼절을 기술한 바 있다. 그것은 바로 풍산(豐産, 풍부한 물산), 연기(娟妓, 아름답고 요염한 기녀), 죽승(竹蠅, 무성한 대나무)이다. 이 진양삼절중의 백미는 연기임이 확실하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지역에 따라 기생에 대한 그 나름의 특생이 있는데, 그 숫자나 기예 면에서는 평양 기생이 으뜸이지만, 의절과 충절 면에서는 진주기생이 으뜸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기생들이 갖추고 있는 공통적인 특색이 기예, 미색, 그리고 의절이지만 진주 기생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애국실천의 덕목이 있었다는 것이다.

◇명주자락에 혈서 쓴 한금화

1919년 3월 중순 남강 변에서 “왜놈들 물러가라”고 크게 외쳤던 진주 기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최초로 ‘진주기생조합’이라는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이 조합은 나라가 망할 무렵 교방이 해체되자 교방의 노기(老妓)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곳으로, 나중에 권번(券番)이라는 기생학교로 그 맥이 이어진다. 

그 해 3월19일 진주 기생 한금화를 비롯한 여러 진주 기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촉석루 쪽으로 행진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일본 경찰이 그 무리 중에서 6명을 붙잡아 구금했는데, 그 중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무궁화 다시 피누나”라는 글귀를 혈서로 썼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와 같은 진주 기생들의 독립만세 사건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자 “그 해 3월29에는 수원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 수원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그 중 김향화라는 기생이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자 뒤를 따르던 여러 기생들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 민속학자 이능화(1869~1943)가 일제강점기인 1926년 발간한 기생 관련 책이다. ‘말을 하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라 불렀던 기생에 관한 언급들을 고전사서에서 찾아 수록했다. 자료사진.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 민속학자 이능화(1869~1943)가 일제강점기인 1926년 발간한 기생 관련 책이다. ‘말을 하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라 불렀던 기생에 관한 언급들을 고전사서에서 찾아 수록했다. 자료사진.

◇진주기생 독립운동 전국 기생 만세사건 기폭제 돼 

뿐만 아니라, 1919년 3월31일자 <매일신보>의 ‘기생들의 만세’라는 기사에서 “이십구일 오전 십일 시 반경에 수원 기생조합 소속의 일부 기생들이 자혜병원으로 검진을 받기 위하셔 들어갔다가,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병원 안으로 들어가 뜰 앞에서도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서 앞으로 다시 나왔다가 해산했는데, 조합원 중 김향화는 경찰서로 인치취조 중이더라”라는 기사가 보인다. 

결국 1919년 3월19일 진주기생의 만세사건은 이후 다른 지역에서 계속되는 여러 기생만세 사건들의 기폭제가 되어, 4월1일에는 황해도 해주에서도 읍내 기생들이 다 같이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니, 이에 용기를 얻은 주변 많은 민중들이 그 운동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만세 시위군중이 3천명이나 되었으며, 그 중 8명의 기생들이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다음날인 4월2일에는 경상남도 통영에서도 그들의 금비녀, 금팔찌 등을 팔아 광목 4필을 구입해 만든 소복을 입고 수건으로 허리를 둘러맨 33인이 태극기와 함께 만세시위를 하다가, 세 사람이 붙잡혀 6개월 이상 옥고를 치렀다고 전해온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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