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신갑아! 식량을 더 가져와라!

일본군 우군이 창녕에 83, 고령 87, 합천 88, 거창 811일 등 시시각각 황석산성으로 접근해 옴에 따라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나 숨어서 눈치만을 보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성안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니 비축된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가 되어 군무장은 아들 신갑, 의갑, 지갑 세 명의 아들을 식량을 추가로 가지려 보냈다. 식량의 운반은 중요한 것이라 아무나 시킬 수가 없었다.

막내 지갑은 관리를 위해 본가에 남고 14일 오전에 동문에 도착하니 일본군의 정찰병들이 있었다. 그래서 식량을 짊어진 수십여 명이 다시 일본군을 피하여 북문으로 올라가서 큰소리로 군무장의 아들들이 식량을 가지고 왔으니 성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북문에서는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문을 열어주지 않자 신갑 일동은 북문근처에 땅을 파서 식량을 묻고는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성안에 부모님이 계시니 죽어도 같이 죽겠다.라고 사정을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본군이 와서 전투가 벌어지고 신갑과 수십 명의 장정들이 전사하고 둘째 의갑과 나머지 장정들은 흩어져 버렸다. 이를 미루어 보면 일본군은 14일 오전에 안음현에 도착을 하고 현청의 접수와 각 부대별 주둔지를 편성하고 일부는 황석산성을 정찰하여 일본군의 부대배치를 위한 작전을 수립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일본군은 14일 오전 안음현에 도착함과 동시에 가도오는 안음현청을 접수하고 구로다는 함양으로 진출하여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르는 조선군의 예비병력의 유무를 정탐하기 위하여 15일 아침까지 함양과 운봉을 유린하고 23개의 코를 베었다고 보고를 하였고 모리데루모도 일본군의 본대는 황석산성을 일주를 하며 공격을 위한 정찰을 실시했다. 황석산성의 백성군은 남문에서 정상에 이르는 길목 중간 좌측에는 식량창고와 무기고가 있고 넓고 평평한 커다란 바위는 지휘소로 사용했으며 구호소는 지휘소 뒤편 정상과 서문으로 가는 소로가 분리되는 곳으로 일본군의 조총이 닿지 않는 곳에 흔적이 있다. 식수를 저장하는 저수지는 지휘소아래 좌측으로 바위 밑에서 나오는 샘물을 저장할 수 곳이다. 그에 연하여 우측은 취사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휘소 우측 성안의 넓은 곳은 훈련장이 되고 밤에는 휴식하고 잠을 자는 숙소로 사용되었다. 각 성문마다 연결이 되는 통로를 구축하여 전투물자의 수송과 병력들의 이동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곳은 성벽을 쌓았다. 지금 남문의 성벽은 일부 보수를 하여 성벽을 볼 수 있으나 동쪽 능선으로는 성벽이 반드시 있어야 할 지점에 성벽이 보완공사에서 누락되어 성벽이 없고 서문이 있는 서쪽 능선에는 400년의 세월에 기울어진 쓰러진 성벽이 일부는 남아있다. 남문 성벽의 뒤로는 물과 기름을 끓이는 가마솥 수십 개를 걸었다.

작전회의는 곽준이 지휘하는 남문의 성루에서 이루어졌다. 이때에 백사림이 제안을 했다. 저놈들이 여기까지 올라오느라고 지쳤을 터이니 내가 나가서 확 쓸어버리겠다.라고 하자 군무장 유명개가 저들은 선발대로 온 놈들이고 곧 대군이 밀려 올 테니 기다려 봅시다. 우리도 준비한 화살이 많지 않으니 아껴야 하고 성벽에 붙어오면 그때는 주저 없이 공격을 하여 성벽에 붙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곽준이 그게 옳겠구만!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황석역사연구소 박선호

경남 함양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동국대학교 군사학학사과정,육군대학과정 이수

새마을중앙연수원교수 역임

몽골이아,베트남 새마을교육 전수

[저서]

[황석산성전투와 임진대전쟁],

황석산성 전투고증연구 논문,

현재 황석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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