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2일차 15일은 조선 최고의 명절 추석날이다. 일본군은 본격적인 전투를 위하여 새벽부터 꽹과리와 북을 울리면서 서둘러서 산을 올라왔다. 이때 북, 동문을 담당한 가도오기요마사가 조선군의 화살을 맞아 기절을 하는 죽음직전의 큰 부상으로 굴욕적인 추석날의 벌을 받았다.

일본군들 사이에서는 「가도오가 죽었다!」라는 소문이 쉬쉬하면서 퍼져나갔으나 조선군들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1차 전쟁 때 용산에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김응려의 취조에서 들어난 사실이다. 그래서 함양으로 진출하여 밤을 지새우며 작전을 한 구로다 군은 쉬지도 못하고 가도오부대와 부대교체를 당하여 구로다군이 북동문을 공격하는 부대가 되었고 가도오 부대는 북동문에서 안음현청으로 철수하여 예비대가 되어 황석산성에서는 전투를 하지 않아 전주성에서 긴급북진부대가 되어 청주를 거쳐서 경상도로 조명연합군을 유도하고 영천에서 대대적인 젊은 포로를 획득하여 돈을 벌고 울산성전투를 하는 12월 그때까지도 1만 명의 전투력을 그대로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함양에서 철수하던 1만 명의 구로다 군이 이른 아침에 황석산성 북문으로 들어가고 1만의 가도오군은 안음현청으로 철수하는 2만 여명이 화림동과 지곡면시목리 사이의 회나미(回南) 고개에서 부대교체를 하는 혼잡한 사건이 조선 사람들의 눈앞 직선거리 3km전방에서 일어났다. 가도오가 추석날 아침에 북문에서 거창사람들의 화살을 맞고 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24일의 전주성회의에 참석한 것을 미루어 보면 순간적으로 기절은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강력하고 견고한 황석산성에서는 특공작전을 한다고 해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을 하고 기절당한 추석날, 요령꾼 가도오는 부상을 핑계로 구로다와 부대교체를 요구하는 꼼수를 부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추석날의 전투는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각종 포를 쏘아 상호간의 포성이 진천을 하였다. 전투에 서툰 조선백성은 울고 불면서 돌을 던지고 끓는 기름과 물을 쏟아 붙고 활을 쏘았다. 이에 유명개 이하 지휘관들과 교위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큰소리를 질렀다. 「싸운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싸우지 않는다고 안 죽는 것도 아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우리에게는 한 달을 먹고도 남을 식량이 있다. 일본군은 식량이 떨어져서 곧 철수를 할 것이다. 어차피 죽을 바엔 싸우다가 죽자.」라고 독려를 하였다. 유명개 군무장이 7,000여명이 한 달간 먹을 식량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3홉x7,000명x30일은 5〜6백석의 양식이 황석산성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군은 남문 앞에서 대열을 지어 제대를 편성하고 조별로 조총을 쏘고 뒤로 빠지고 다음 대열이 들어가서 총을 쏘는 전형적인 조총전술, 즉 충주탄금대와 같은 평야지대에서 적진 앞에서 조별로 총을 쏘고 뒤로 빠지는, 적 앞에서 부대가 빙글빙글 도는 사격전술을 구사하다가 경사가 급하고 기동공간이 평탄하지 못해 조총의 효과가 발휘되지를 않자 평지조총사격전술을 포기를 하였다. 산악전투에서 조총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은 일본군이 황석산성에서 궤멸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조선군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이 하루 종일 소득도 없이 싸우다가 밤이 되자 손실만 당한 일본군은 산 아래로 철수를 하여 대나무 방패, 죽순(竹盾) 등을 급조하여 다음날의 전투를 대비하였다.

황석역사연구소 박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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