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성벽! 황석산의 어깨를 지켜라

황석산성의 백성군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를 증명하는 지점이 있다. 지금현재 남문 쪽의 성곽을 복원하고 끝나는 부분에서 동쪽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비탈 능선에는 성벽이 없다. 안의면에서 보면 어금니가 깨져 빠진 듯하고 솟아오른 능선 아래 남문 쪽 그곳은 황석산성의 어깨에 해당하는 견부(肩部)로서 반드시 있어야 할 지점에 성벽이나 성곽의 흔적이 없을까를 두고 필자(筆者)는 참으로 오래 동안 고민을 하고 또 생각했다.

1597년 8월 그때 일본군이 황산마을이나 우전마을에서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와서 동문이나 남문의 정면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백성군의 화살을 어느 정도 피할 수도 있고 보다 쉽게 황석산성 내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지점을 거쳐야 한다. 만약 일본군이 그 지점을 확보한다면 남문의 내부를 관찰 할 수 있고 바로 성내로 진입도 가능하며 동문을 등 뒤, 내부에서 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조선군의 입장에서도 많은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할 수도 없는 좁은 지점이라 반드시 성벽을 쌓아서 일본군의 접근을 막아야 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달려들기도 힘들었지만,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뺏어야 하고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지점인데 지금은 성벽의 흔적도 없고 아무도 그 지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일본군의 인해전술에 화살이 떨어지고 화목마저도 떨어졌던 8월18일 새벽, 급박한 그 순간까지 손발이 찢어지고 피가 나도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그 지점, 성벽의 돌을 뜯어 남김없이 던짐으로써 처절하고도 맹렬하게 싸웠던 전투의 흔적마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성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400년 후에 성벽을 복원할 때 복원계획이 없었다는 것도 당연하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가족과 나라를 지킨 백성들의 피가 어리고 영혼이 서린 잃어버린 흔적의 붉은 피가 깊숙이 잠긴 곳, 사라진 성벽을 다시 복원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군은 맹렬하게 달려들었고 조선군은 성벽을 모두 뜯어 치열하게 일본군을 저지시켰던 황석산성의 생사가 결정되었던 결정적인 그 지점에 진하고도 진한 붉은 무궁화 꽃, 동백꽃 한 송이라도 심어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역사의 현장, 황석산의 견부(肩部)다.

백성군은 전투 단위가 오늘날처럼 분대나 소대가 아닌 가족단위로 이루어져 가족이 바로 배수(背水)의 진(津)이 되었기 때문에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모두가 서로서로 엉켜있는 칡넝쿨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형제, 자매, 또는 사돈지간이었다. 싸우다가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가족의 목숨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아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절박감이 성벽을 허물어 죽을 때까지 던져 성벽의 흔적이 사라지고 일본군을 궤멸시켜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오랫동안 의병대장 김면의 거창이나 김천 등의 전투장에서 다져진 초계정씨 정유문 형제 일족들의 경험이 황석산성의 견부(肩部)를 지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황석산성의 어깨에 해당하는 이지점의 성벽들이 흔적도 없이 무너지고 한 개의 돌마저 남김없이 사라진 것을 미루어 보면 백성들이 탈출을 함으로서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끝까지 싸웠고 전원이 옥쇄를 한 것이 분명하다. 띠라서 지족당 문집의 황석산성실적에 「초혼유성(初婚踰城)도주자(逃走者) 불가승계(不可勝計)」라고 하여 「싸워도 이길 승산이 없다는 생각을 한 백성들이 초저녁에 탈출을 하여 산성이 무너졌다,」라고 하는 것은 군무장 유명개가 새벽순찰을 할 그때에 전 전선에 이상이 없었고 새벽이 되어서야 전투물자가 떨어졌음으로 초저녁부터 백성군이 탈출을 했다라고 하는 황석산성 실적은 왜곡되어진 식민사학적인 기록이다. 따라서 곽준안음현감이 탈출하는 백성들을 못나가게 했다는 것이나 조종도 함양군수가 「모두가 다 나가고 남은 가문은 너와 나 2〜3가 뿐」 이라고 하는 독백(獨白), 등은 모두가 일본인들이 27,000명으로 조선군을 가볍게 물리쳤다, 라는 것으로 날조하기 위한 부가적인 왜곡이고 조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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