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성벽! 황석산의 어깨를 지켜라
화살도, 화목도 떨어진 18일 새벽 전투

황석산성의 어깨에 해당하는 이지점의 성벽들이 흔적도 없이 무너지고 한 개의 돌마저 남김없이 사라진 것을 미루어 보면 백성들이 탈출을 함으로서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끝까지 싸웠고 전원이 옥쇄를 한 것이다. 띠라서 지족당 문집의 황석산성실적에 「초혼유성(初婚踰城)도주자(逃走者) 불가승계(不可勝計)」라고 하여 즉 「싸워도 이길 승산이 없다는 생각을 한 백성들이 초저녁부터 탈출을 하여 산성이 무너졌다,」라고 하는 것은, 지족당의 『황석산성 실적』마저 조선 총독부가 가필(加筆)을 했거나, 지족당 본인이 전투에 직접 참전을 하지 않아서 전투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왜냐하면 군무장 유명개가 18일 새벽순찰을 하는 그 시간까지는 전 전선에 이상이 없었고, 백사림이 “젊은 사람들마저도 다 지쳤다,”라고 한 말을 미루어 보면 백사림이 탈영을 하는 그 시간까지는 비록 백성들이 지치기는 했지만 전 전선에는 이상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저녁부터 백성들이 성벽을 넘어 탈출을 시작했다는 지족당 박명부의 황석산성 실적이나, 곽준이 탈출하는 백성의 목을 베며 못나가게 했다는 기록이나, 조종도가 「모두가 다 나가고 남은 가문은 너와 나와 2〜3가 뿐」 이라고 하는 독백(獨白) 등, 이것 모두는 일본군 27,000명이 한사람도 죽지 않고 조선군이 스스로 무너졌다, 라는 것으로 날조하기 위한 것으로 총독부의 왜곡이다. 전투에 임하는 곽준안음현감의 각오 중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만 사는 것도 구차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요, 죽는 것보다 싫은 것은 없지만 죽는 것도 구차하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말처럼 이미 죽음을 각오한 조선군의 지휘관들이 죽는 순간의 마지막에 초라하게 죽을 수는 없는 것으로 곽준이나 조종도가 생사가 결정되는 전투장에서 일본군의 도덕성을 나무라는 연약함을 보였다든가 아들들이 아버지를 감싸다가 함께 죽었다는 논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일본군에 맞서서 끝까지 강력한 저항을 하고 칼을 휘두르는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 졌으나 중과부적으로 최후를 장식을 하고 조영한은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백성의전쟁 황석산성대첩 19

화살도, 화목도 떨어진 18일 새벽 전투

지루한 전투는 계속되어 17일 밤 자정이 지나고 18일 새벽이 오고 있었다. 군무장 유명개는 화살이 다 떨어져 간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화살뿐만 아니라 전투 중에는 어느 곳에서도 보급을 받을 수 없는 전투물자들이 모두 바닥이 나고 있었다. 기름도 바닥이 났고 심지어 물을 끓일 화목마저 떨어졌고 성벽을 뜯어 던지던 돌과 자갈마저 다 떨어져 갔다.

공격하는 일본군은 자기들이 선택한 장소에서 전투를 하지만, 지켜야 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를 모르니 한숨도 잘 수가 없고 쉴 수도 없는 5일간의 긴 전투에 지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상황이 심각한 것을 파악한 유명개는 17일 자시(子時)가 지나 18일 새벽 차가운 달빛을 받으며 순찰을 나갔다. 서문과 남문은 조종도와 곽준이 있으니 든든하였다. 안음현 사람으로서 1577년 거창좌수로 위촉을 받은 후 1597년 오늘까지 20여 년간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거창과 합천사람들이 지키는 북문으로 갔다. 전투에 지치고 심리전에 시달린 백사림은 군무장에게 말했다. 「이제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백성들 모두가 지쳤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오?」 하고 물었다.

유명개는 노련한 전략가다운 답변을 했다. 「지치기로 말할 것 같으면 지키는 우리보다 공격하는 일본군이 훨씬 더 지쳤을 것이요. 장군께서는 북문은 지키기가 쉬우니 북문보다 동문에 더욱 집중하여 사력을 다하여 지킨다면 일본군들은 곧 물러 갈 것입니다, 장군님! 힘을 냅시다.」 라고 당부를 하고 동문을 지나고 일본군의 인해전술에 성곽들의 흔적마저 사라져가는 처절한 전투가 진행되는 능선을 둘러보고 남문에 와서 곽준, 정유영, 조종도, 정언남, 유세홍, 등 이 모여 대책을 논의 하는데 백사림의 진영에 연락병으로 파견 나간 송인련과 유명개의 가노 물금과 은작이 와서 보고를 했다.

김해 영공께서는 벌써 밖으로 나가셨는데 영감님께서는 아직도 여기에 계십니까?」 라고 상황보고를 했다. 이에 놀란 곽준이 「저놈이 유언비어를 유포하는구나. 너는 당장 군법회의 감이다.」 라고 하면서 할을 쏘면서 참모장 정유영을 보내 현장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왜군의 진입소식을 접한 조종도가 합세하였다.

이에 유명개도 이미 무너진 대세를 어쩔 수가 없었다. 새벽에 전투현장을 둘러본 유명개 군무장은 물금과 은작이 와서 「동문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박두하고 있으니 군무장께서는 속히 피하소서,」하니, 유명개는 놀라지도 않고 「군사(軍師)가 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국난을 당하여 어찌 구차하게 살겠느냐? 이 성안이 내가 죽을 곳이다.」 차고 있던 전대를 풀어 가노 물금에게 주면서 「이것을 우리 아들에게 전해주어라.」 은작에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백골을 거두어라.」 하고 조종도, 곽준과 함께 식량 창고와 무기고를 태우고 곽준은 이상과 이후 두 아들과 함께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칼을 휘두르며 싸우다 전사했고 조종도는 부인만은 살리고 싶어 「부인은 두 아들과 함께 밖으로 피하시오.」 했으나 부인께서 거절하여 두 아들과 함께 싸우다가 장석위에서 전사하고 셋째 조영환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고 춘수당 정수민의 아버지이며 조종도의 참모장이었던 정언남부부도 끝까지 전투를 하고 전사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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