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대첩 승리 왜적 귀 자르니 '6수레'
조선 · 명 양국 지휘한 최초 조선장수

정기룡 장군이 쓰던 장검. 사진제공=문화재청
정기룡 장군이 쓰던 장검. 사진제공=문화재청

본 기사는 11월14일자 11면 기사 ‘‘육지의 이순신’ 충의공 정기룡 장군’에서 사실 관계 상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필자와 상의 끝에 수정 보충한 글입니다. 혼란을 드린 점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 편집자주

1592년 4월23일. 정기룡 장군은 경상우도방어사 조경 휘하의 별장으로 거창군 신창(현 거창군 응양면 노현리)에서 일본군 제3진 구로다 나가마사의 선봉 500명과 조우한다.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장군의 기마돌진 공격으로 왜병 100여명을 살해하고 적을 물리쳤다. 이 최초의 승리가 전국에 알려지자 온 나라가 환호하였고 우리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이번 회에선 정기룡 장군의 주요 공적들을 정리해보았다.

상주대첩 승리 왜적 병참선 차단

1592년 11월21일 왜적 제1군 고니시유키나가(소서행장, 小西行長)의 병참기지로 활용되고 있던 상주지역을 수복하라는 선조의 특명을 접하고 휘하 2천 여명 병력으로 상주창과 왜적 주둔지를 공격했다. 당시 왜적의 수효는 1만5천명이었으나 야간 기습공격으로 이들을 격멸하였는데 그 사살 인원이 1만2천명에 이른다. ‘매헌실기’ 등의 기록에는 사살한 왜적의 왼쪽 귀만 잘랐는데 무려 6수레나 되었다 한다. 이 전투로 왜적 고니시유키나가군의 병참선이 차단되어 선조가 몽진한 의주로의 진격을 멈추게 하였다.

명나라 군사를 지휘하다

정기룡 장군은 1597년 36세 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해 경주성, 울산성 등을 수복하였으며, 이후 진주성 탈환작전에 참가,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고 함양 사근역 전투에서 사망한 명나라 부총병 이녕을 대신해 명의 어왜총병관(禦倭摠兵官)이 되어 조선, 명 양군을 지휘한 최초의 조선 장수였다.

왜적 중로군 북상 저지 영남 지켜

전주성 공략에 동원된 12만 왜적이 전주성을 무혈입성 하고 천안, 직산까지 진격하자 조선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해 포진하고 있었으나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하여 수군의 서해안 진격이 실패하자 보급선이 차단되고 합동공격이 어려워진 왜군이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전라도 침공군은 순천과 사천에, 경상도 침공군은 정기룡 장군에 의해 북상이 저지되어 울산왜성에 주둔하여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조정에서는 왜적이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뉘어 조선군을 견제하면서 그 중로(中路)를 따라 조령으로 치달으면 서울도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1597년 9월22일 당시 상주목사 정기룡 장군을 경상우도 31개 고을의 모든 군권을 지휘하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여 왜적의 중로 침공을 차단하게 하였다. 당시 왜적들이 중로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장군의 선제공격에 굴복하여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1773년 영조 ‘충의공’ 시호 내려

1605년 선조는 도승지 신흠에게 정기룡 장군을 원종선무일등공신(原從宣武一等功臣)에 새롭게 취품하라는 교지를 발표하게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7년만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기룡 장군이 서거한지 150년이 흐른 1773년에 영조가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찬인 하동 향토사연구소장/정기룡장군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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