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향만리(茶香萬里)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한국토산차연구원장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
한국토산차연구원장

 

원효(617-686)는 신라 진평왕 39년에 출생하여 신문왕 8년에 작고한 신라의 승려이로서 아명은 서당, 집에서 보통 불려는 이름은 신당, 그의 어머님 꿈에 하늘 유성이 품으로 들어왔는데 그 이후 태기가 있었다고 한다. 아이를 분만할 때는 하늘에 오색구름이 주변 따을 덮었다 그날이 대업(大業) 13년 정축(丁丑)이였다 원효는 날 때부터 스승을 따라 배운 것 아니고 스스로 터덕하였다

원효의 중국유학을 못 갔지만 그의 행장은 당승 전에 상세히 기록된 전기가 있어 제외하고 전기 내용에 차(茶)와 관계되는 내용을 소개한다.

원효는 밤에도 낯에도 어느 곳에나 차(茶)가 좋아 마신다 하루는 아침 일찍부터 공연하는 배우처럼 거리에서 춤을 추며 허리에 차고 있는 박아지로 이런 노래를 외쳐 부렸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려나. / 내가 하늘를 떠받칠 기둥을 쩍으리

이 노래를 들었던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태종(신라 태종무열왕)이 듣고 말하기를 “아마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아들을 낳겠다고 하는 것 같다. 나라에 현인이 있으면 이익 될 것이다”하였다 그 때 요석 궁에 홀로 사는 공주가 있었으므로 궁의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서 궁으로 모시오게 하라 하시니 관리들은 명을 받고 원효를 찾으로 하는데 원효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일명 유교)를 지나다가 그들과 만나 일부러 냇물에 들어가셔 옷을 젖었다

원효를 요석 궁으로 모시여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날 하룻밤 잠을 요석 궁에서 자게 된다 그후 공주는 임신하여 설 총을 낳았다. 설총은 태어나서 부터 총명하여 경사에 박통하여 훗날 신라 10현 가운데 한 분이다, 따라서 우리 언어로 중국과 풍속 문물이 통하게 하였던 일명 이두문자(吏讀文字)로서 육경(六經) 문학을 해석하기 위하여 지금까지도 한문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전수하여 이어 갔다

그 후 원효는 파계하여 설총(薛聰)을 낳은 뒤부터 속인의 옷차림을 하였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였다 때로는 배우같이 춤을 추며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바가지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이상하였다 원효는 그 모양에 따라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음경(華音經) 속에 말한 < 일체의 무애인은 한길로 죽고 사는 것을 벗어 난다;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문구를 무애(無碍)라 하였다

즉 차 한 잔 마시는 것은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두 한계도 없고, 정지도 계속도 없다지만 존재도 부정도 없다고 외부 내부의 장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움이란 뜻으로무애를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사람들이 노래를 불렀으며 춤을 추어 세상에 알렸고 무리를 지어 읊었기 때문이다 불타의 이름을 알리고 남무(南無)의 호칭을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원효의 공이였다

원효가 탄생한 마을을 불지촌(佛地村). 개원한 절을 초계사(初開寺) , 자칭 원효(元曉)라 한 것은 모두 불일(佛日)을 처음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다 원효라는 뜻은 우리들 말이나 당시 사람들은 <세벽. 해가 듣는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금강경소(金剛經䟽)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수행해야하는 52단계에서 30-40단계에 이르러 붓을 논았다 원효는 우리들 몸을 백송(百松)으로 나눔하고 현 위치의 단계를 초지(初地)라 말하였고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는데 이를 각성 혹은 불법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 참고)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