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유명개도 이미 무너진 대세를 어쩔 수가 없었다. 새벽에 전투현장을 둘러본 유명개 군무장은 물금과 은작이 와서 「동문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박두하고 있으니 군무장께서는 속히 피하소서,」하니, 유명개는 놀라지도 않고 「군사(軍師)가 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국난을 당하여 어찌 구차하게 살겠느냐? 이 성안이 내가 죽을 곳이다.」 차고 있던 전대를 풀어 가노 물금에게 주면서 「이것을 우리 아들에게 전해주어라.」 은작에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백골을 거두어라.」 하고 조종도, 곽준과 함께 식량 창고와 무기고를 태우고 곽준은 이상과 이후 두 아들과 함께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칼을 휘두르며 싸우다 전사했고 조종도는 부인만은 살리고 싶어 「부인은 두 아들과 함께 밖으로 피하시오.」 했으나 부인께서 거절하여 두 아들과 함께 싸우다가 장석위에서 전사하고 셋째 조영환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고 춘수당 정수민의 아버지이며 조종도의 참모장이었던 정언남부부도 끝까지 전투를 하고 전사했다.

백사림의 탈영과 황석산성대첩의 종료(19)

유명개는 수십 명의 교위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부인과 함께 전사했고 노비 은작도 전사했다. 당시 일본군병사들은 평균 신장이 140cm로 왜놈이라는 말이 제격일 정도로 왜소했지만 근접전투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백성군은 일본의 통일전쟁애서 다져진 칼을 들고 덤비는 백병전에는 일본군을 당할 수 가 없었다. 돈을 벌겠다고 동료들의 코를 베어 전쟁목적을 상실하고 궤멸상태에 빠져 있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전선이 무너지자 동서남북 전 전투장에서 조선 사람들의 코 수천여개를 전리품으로 챙겨갔다. 황곡리 초계정씨 정유문 정유무 곽준의 참모장 정유영 3형제와 그의 어린 조카들도 모두 전사했다. 봉산리 숲안의 류세홍과 류강도 전사했고 그의 사위 귀곡리에 효자비가 있는 박은호 부자도 전사했다. 안음현 청야담당자 정대익과 정대유 형제도, 임진년 1차 전쟁 중 거창의 의병대장 김면의 거창전투에서 남편이 전사하고 정유전쟁의 유능한 전사가 된 옥녀부인도 황석산성에서 싸우고 또 싸우다가 수많은 부녀자들과 함께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그녀들의 피가 바위를 적시니 피바위 전설이 되었다.

거창유씨 유명개 집안의 유문호가 적의 칼을 맞고 전사하자 그의 부인 곽준현감의 장녀는 “내가 아버지와 오빠들의 죽음을 보고도 살았던 것은 남편이 있기 때문인데 이제 남편마저 죽었으니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라고 하며 목을 매어 죽으니, 아버지 곽준안음현감은 신하로서, 아들들은 아버지에 대한 효자로서, 딸은 남편에 대한 열녀(烈女)로서 일순간 한 가문에서 삼강(三綱)을 이루어 현풍곽씨 가문의 빛이 되었고 7천여 부녀자 노약자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합천초계삼가산음 등지의 피난민도 모두가 끝까지 버티며 옥쇄를 했다.

당시 곽준의 나이는 47세였고 유명개는 50세였고 조종도는 61세였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남명 조식의 교육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사람들이다. 곽준은 남명의 제자 한강 정구에게서, 유명개는 남명의 수제자 합천의 정인홍에게, 조종도는 직접 남명 조식에게서 교육을 받아 학연과 이념으로 뭉쳐진 사람들이다. 남명이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교육자(敎育者)라면 유명개와 곽준, 조종도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이념을 몸으로 가르치며 실천하는 열사(烈士)요 사상가(思想家)들이었다. 정유문의 가족들은 전투 중에 전사를 했고 유세홍 부자와 박은호 부자는 밤을 새는 전투를 하고 북문으로 나오다가 아직 철수하지 않고 남아있던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안의면 귀곡리에 기념비가 있는 박은호부자의 묘지가 효자비 근처에서 전후 422년이 지난 최근에야 귀곡리 출신의 박응호(朴應鎬) 옹에 의해서 박은호부자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백사림이 전투물자의 부족으로 아우성을 치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김필동을 비롯한 몇 사람들의 병사를 앞세우고 성문을 열어주고 전투장을 이탈할 수 있었던 것은 전투물자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제승방략전술에 의해 임명된 성주로 재지사족이 아닌 자기만 떠나면 홀가분한 지연, 학연, 가족적인 연고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인으로서 지방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알력이 있었던 백사림은 제승방략전술에 의해 임명된 마지막 성주였을 것이다.

백사림은 군무장의 말대로 조금만 더 참고 사력을 다하여 버텼으면 전투에 지치고 굶주림에 지쳐 기진맥진한 일본군이 대열을 이탈하고 부대가 해체되어 스스로 무너지는 중인데 기다리기만 해도 백성군의 승리가 될 수도 있었고 상을 받을 수 있는 그 순간 백사림의 잘못된 성급한 판단은 백성군 7천여 명을 코를 빼앗기는 죽음으로 내 몰았고 백사림이 데리고 온 장교 김필동을 비롯한 밀양사람들과 자신은 살았지만 자자손손 후손들에게도 부관참시를 당하는 만고의 역적이 되어 백씨들 집안의 족보에서도 사라졌고 백사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후로 황석산성을 평정한 구로다는 보고서를 썼다. 목 13개, 코 25개, 생포 2명으로 38명을 죽였다고 황석산성 점령보고를 했다. 8월18일 사시, 10시경에 안음사람들이 전장을 확인하였다. 이리하여 5일간의 기나긴 전투 황석산성 대첩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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