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교회 종소리 신호를 시작으로

1919년 3월 18일(음력 2월 17일) 진주 장날 정오, 진주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된 기미년 진주 독립만세운동은 21일까지 4일간 시내 지역에서 지속해서 이어졌고 진주군 전체로는 5월까지 지속되었다. 주지하듯이 서울에서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지어 경남에서는 3월 11일 오후 부산을 시작으로, 13일 동래와 밀양 등지로 퍼지었다.

당시 경남도청 소재지였던 진주는 3월 18일,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경찰서와 헌병대를 중심으로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3월 10일 “삼남은 왜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내용의 격문이 시내 각처에 배포되고 만세운동의 기운이 퍼지게 되자 진주 헌병대에서는 11일부터 최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계를 더욱 삼엄하게 하였다. 시내 각 학교에 임시휴교를 명하고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 학생들에 대한 미행과 집회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고, 타지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강제로 귀가시켰다.

그러나 일제의 삼엄한 경계도 독립에 대한 진주 지역민의 의지를 억누르진 못하였다. 드디어 3월 18일 정오, 김재화(金在華) 선생을 비롯한 22명의 주도로 진주 시내 각 처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진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재화, 박진환(朴進煥), 심두섭(沈斗燮), 강달영(姜達永) 등은 1919년 3월 3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하였는데 마침 3월 1일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3월 11일 독립선언서를 몸속에 숨기고 진주로 돌아왔다. 진주로 돌아온 이들은 강상호 선생을 비롯한 진주지역 지도층 인사들과 만세운동에 대한 뜻을 같이하였고, 비교적 시내와 가까우면서 감시가 소홀 한 김재화의 집(현 진주시 하촌동 드무실 마을)에서 진주 만세운동 계획을 모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계획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나누고 3월 16일 천전리 산중(망경산)에서 독립선언서와 교유문 약 1,000여 매를 인쇄하여 18일 진주 법원과 시장을 비롯한 각 처에서 인쇄물을 배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첫날 3월 18일, 약 3,000~5,000여 명의 군중이 법원 앞을 시작으로 진주성 내 경남도청으로 만세운동을 진행하였다. 오후 4시경 시위군중의 대열이 도청 앞에 이르렀을 때 군중은 약 3만 명으로 늘어났다. 일군 헌병과 경찰은 시위 군중 주동 인물 의복에 잉크를 뿌려 두었다. 이들은 석양(夕陽)에 이르러 곤봉 등으로 난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여 약 3백여 명을 검거하였다. 저녁 7시경에는 노동자 독립단이 나타나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저녁 9시경에는 걸인 독립단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우리가 유랑하게 된 것은 왜놈들이 우리 생로를 박탈한 탓이다”라고 하며 만세운동을 계속하였다.

둘째 날 3월 19일, 아침부터 시내 각 상점은 문을 닫고 철시를 하는 가운데 오전 11시경부터 기독교청년단의 음악대를 선두로 하여 만세운동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날은 더욱더 많은 약 8,000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는데, 특히 오후부터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기생독립단이 나타났다. 이들은 “내가 죽고 나라가 독립되면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외치면서 남강 변두리를 돌아서 촉석루를 향하여 행진하였는데, 일제는 이 가운데 주모자 6명을 체포하여 이들을 해산 시켰다. 또 오후 4시경에는 청년 독립단이 나타난 “무력에는 무력으로 상대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투석으로 일제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이날 기생독립단 6명을 비롯하여 156명이 구인되었는데, 이 가운데 특히 학생 약 50여 명이 구인되었다.

셋째 날 3월 20일, 오전부터 수천 명의 군중은 다시 음악대를 선두로 질서 정연하게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 헌병대는 기마대를 출동시켜 총검으로 시위대의 눈을 찌르는 등 각종 흉악한 방법으로 시위대를 공격하는 잔인함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때 농민독립단이 낫, 도끼 등의 농기구를 사용하여 헌병대에 맞서게 되자 농민들의 위세에 눌린 헌병대는 후퇴하게 되었고 이들은 도청으로 진행하며 시위행진을 계속하였다.

넷째 날 3월 21일에도 어린이와 부인으로 구성된 독립단이 등장하여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어린 아이와 연약한 부녀자들로 구성되어 질서 정연하게 독립 만세를 외치던 이들에게도 일제는 난타하며 무자비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부녀자 독립단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친 어린이를 않고서 “자식이 독립을 위하여 죽어 가는데 어미도 같이 따라가련다”하며 만세운동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날 일제의 탄압으로 5~6명의 의로운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4일간 진주시내 만세운동은 일제 기관의 무자비한 탄압과 마산에서 헌병 진압대가 증원됨에 따라 평화로운 만세운동은 계속 이어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만세운동이 지속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3월 19일 철시했던 상점들이 4월 2일이 되어서야 다시 영업이 시작되었다는 상황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시외 지역의 상황을 보면 정촌면 관봉리의 강재순(姜在淳)은 강한순(姜瀚淳), 허현(許炫), 이종락(李鍾洛) 등과 주도하여 정촌면 주민 5,000여 명과 함께 천전리 남강변까지 진출하여 일경과 충돌하였다. 이때 선두의 서기봉(徐奇峰), 이준이(李俊伊) 두 명이 일경의 칼에 쓰러지자 강한순이 나서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이끌다가 체포되었다. 이 밖에도 3월 20일의 미천면과 금산면, 3월 22일 수곡면, 3월 25일과 31일 문산면, 4월 3일과 8일 일반성을 중심으로 진성과 사봉의 거주민들이 합세하여 만세운동을 하였다. 또한 5월 나동면 삼계리의 박재룡(朴在龍)과 박재수(朴在秀), 축동면 길평리의 강대익(姜大翼), 사천면 중선리의 김형권(金亨權),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의 권도용(權道溶)등은 경남유림대회(慶南儒林大會)를 개최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려는 운동을 계획했다가 탄로되어 검거되는 일이 있었다.

1919년 3월 18일, 기미년 진주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재화를 비롯한 23명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4월 1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첫 공판이 있었다. 이날 3,000여 명의 시민이 재판장에 몰려와 만세 지도자 압송에 대한 항의 시위를 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또다시 발포하여 대구사람 이육식(李陸植)이 사망하는 등 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나흘 뒤 4월 22일, 이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최고 징역 2년 6월에서 집행유예까지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 가운데 17명은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들의 재심 판결은 6월 17일 이루어졌는데 1심보다 형량이 증가하여 징역 3년에서 6월까지 판결이 내려지게 된다. 복심 판결 자 가운데 다시 13명은 최고 재판에 항소하였으나 9월 6일, 최고 재판에서 항소가 기각됨으로 이들의 형은 확정됐다. 그러나 이들 중 김재화 선생은 이듬해 3월 6일 고문과 옥고로 인해 옥중 순국하였고, 권채근 선생은 1월 옥중 순국했다.

1919년 당시 진주군 전체 인구가 약 4~5만 명 정도였고, 진주시내 지역인 진주면 지역의 인구는 대략 1만~1만 5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각종 통계를 유추해 볼 때 대략 2만 5천~4만여 명 정도의 인원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거의 모든 진주 사람이 참가했고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많은 인원이 진주 만세운동에 참가한 것이다.

기미년 진주 만세운동의 특징은 신분이나 금전적으로 최상층에서부터 최하층까지 모두가 참가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더라도 진주에는 재력가들 다수가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산가 8천 원에서 1만 원 이상이 다수였는데, 지금의 돈으로 환산해도 대략 수십억 원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더불어 기생과 걸인으로 대표되는 사회 최하층민의 참가이다. 물론 이것이 진주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국의 만세운동 가운데 처음으로 기생과 걸인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진주정신으로 대변되는 진주와 진주 지역민에 대한 애착과 유대가 강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진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은 출옥 후 진주를 중심으로 민권 중심의 사회변화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강달영 선생이 앞장선 노농운동과 강상호(姜相鎬) 선생을 중심으로 한 형평운동 등이다. 1922년 9월, 강달영 선생을 중심으로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는 소작 노동자대회를 개최하여 지주들의 횡포에 대항하였고 1923년 4월, 강상호 선생은 백정들의 인권을 위해 형평사를 창립시켰다. 신분과 계급을 타파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운동에 진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신 분들이 다시 앞장서 나갔다. 또한 1924년 5월, 박진환. 강달영 등은 고보(高普)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진주지역에 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 이후에도 진주지역 독립운동은 학생들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계속 이어지게 된다. 1920년에는 8월 31일, 다이쇼(大正)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에 진주농업학교 2년생 문위동(文謂東), 신영안(申英安), 김익상(金益祥) 등이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72명이 대규모로 검거 되었다. 이 계획에는 기미년 진주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광림학교를 비롯해 진주 제1보통학교와 제2보통학교 학생 12명이 계획에 동참하여 처분을 받았는데, 이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만세운동 계획이었다. 또한 11월에도 진주청년친목회의 박영환 등이 독립운동 기획 혐의로 피검되었다. 1921년 5월에도 김두현, 박경선 등 15명이 3.1 만세운동 후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 중 경찰에 피검되는 일이 있었고, 11월에는 진주농업학교 학생 13명이 독립운동 비밀결사대 TK 단 결성으로 피검되기도 하였다.

진주가 하루아침에 충절의 고장이란 별칭을 얻은 것이 아니다. 임진년과 계사년의 진주성전투를 시작으로 1862년 진주농민항쟁을 거쳐 1919년 기미년 진주 만세운동과 일제강점기 사회변화 운동을 지나 지금까지, 진주 사람의 진주 정신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강 호 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

경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전공

경상대학교 국사편찬위원위원회 지역사 자료수집연구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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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진주 기미년만세운동 길 걷기』, 2013,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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