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재수

고등학교 교장퇴임
한국문협, 한국수필가협회
남강문학회 회원

처 외숙(外叔)의 연세 올해로 아흔 셋이다. 그 세월에 지금은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어느 봄 한 날 딸을 불러서 “봄이 가고 있다. 집안에만 박혀 있으니 답답하다. 밖의 바람 한번 쐬고 오자.”

기동이 불편하면 살아 있어도 하릴없다. 얼마나 답답하실까. 친딸이 운전하고 당신 누이의 딸 생질과 생질서(甥姪婿)가 외삼촌을 함께 모시고 창원을 출발, 서부 경남 나들이에 나선다.

나에게 장인은 빈자리다. 6·25한국전쟁 혼란 중에 가뭇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해서 외숙 세 분이 후견인이 되어서 생질들을 공부시키고, 짝을 지어 살게 하는 그 뒷바라지를 다한 것이다. 저 세월에 오늘 함께하는 막내외숙만 남고 모두 세상 뜨셨다. 찾아뵈면 당신은 온화한 웃음으로

“오래 살아 미안해….”

그 말의 행간을 우리는 짐작한다. 먼저 세상 떠난 당신 형제자매분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언젠가 두고 갈 인연들의 사랑, 연민 때문일 것이다. 처 외숙은 눈 맑고 가슴 따뜻한 선한 마음의 소유자이시다. 천성이 남 도와주기 좋아하고 딱한 사정 듣고 거절 못하는 타고난 성품으로 이때껏 좋이 사신다. 젊어서는 사업도 크게 하고 어려운 학생 도와주고 상공인(회장)으로서 지역사회발전에 헌신하신 분이다.

마산 대구 간 고속도로 개통식 날 처음 도로를 달리며 추진 중 어려웠던 건설과정을 설명하던 그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진주를 지나고 ‘산청휴게소’에서 잠깐 쉰다. 전국 고속도로 평가에서 최우수로 소문난 그곳, 전망대 정자에 오르니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마주보이고, 아래로 웅석봉, 그 끝자락에 경호강의 면경 알 같은 맑은 물이 발밑에서 소리를 내며 흐른다. 물 좋고 정자 좋다. 그래서 산 좋고 물 맑은 곳, ‘산청山淸’ 그 이름인가.

엊그제 내린 비로 하늘 땅 산 나무 등, 온 물상이 다 끼끗하다. 한나절 봄 햇살 따뜻하고, 구름 흐르고, 산골짜기 나무숲 풀잎들 야들야들 바람에 흔들리며 윤기 자르르 빛난다.

외숙은 이곳 공기가 달다며 가슴 펴 긴 숨 몰아쉰다. 멀고 가까운 풍경을 감상하며 잘 다듬어진 길로 더 달려서 ‘산청 한방약초원’에 도착한다. 2013년 ‘세계전통의약 엑스포’가 열렸던 곳이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두 생질내외들이 환영하여 맞이하며 어울린다.

넓은 얼안의 시설물들 주변을 함께 둘러본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시는 외숙은 산야의 꽃들에 눈을 주며 “오늘은 내가 꽃잔치에 초대받았네. 나 꽃피는 시절에 떠나면 마음에 머금었던 저 꽃빛들을 다 풀어줄 것이네. 모든 것 잊고 떠날 것이네.”

지혜롭게 살다간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벤자민 프랭클린은 ‘긴 인생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인생은 충분히 길다’고 했다. 바로 이 고장사람으로서 의성이라 일컫는 허준, 면화를 재배케 한 문익점, 실천을 중시한 조식, 큰 스승 성철님들의 한생은 이미 몸은 갔어도 오래오래 남을 인생을 사신 분들이다. 사람의 생명이 갖는 유한성과 그리고 유약함을 우리들 인간이 어찌하랴. 한번 나서 한번 죽는 것이 인간이다.

읍내에 들어 와서 일행은 이름도 예쁜 꽃봉산 한 장소에서 식사자리를 함께 한다. 화창한 봄을 맞이하여 오늘 나들이 내내 평온함이 깃들어 있는 소박한 기쁨을 누린다며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반주 한잔 하시니 삼대에 걸쳐 문집을 낸 집안답게 오늘의 우리 외숙님은 그저 행복에 겨운 듯 맑은 소리로 한소리 하신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으시고

새려면 늘 언제나 오늘이소서

청구영언에 실린 구전 노래 말이다. 나 이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세상의 해거름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루 봄 소풍이 지나니, 내 봄날은 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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