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전기까지는 晉州牧 班城縣이라 하다가 東面 班城里․非羅洞里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非羅洞里를 班城里에 합하여 다만 班城里라 하였다.

고종1년(1864년) 이후에는 里가 面으로 개칭되어 班城面이라 하다가 갑오경장 이후에는 班城面이 一․二班城面으로 분리되고, 또 晉城里가 內․外晉城面으로 분리됨으로써 外晉城面이 지금의 관할구역으로 포함되었다.

1914년 3월 1일, 晉州郡 一般性面 ․ 外晉城面 ․ 內晉城面 일부 ․ 咸安郡 上寺面 多武里 등을 통폐합하여 一班城面이라 하였다.

◎ 지명유래(地名由來)

창촌리(倉村里) 고려 현종9년(1018)에 진주목 반성현이 되어 의창이 있었다. 별호를 편월이라고 하였다. 조선 세종 1년(1419) 반성창을 두었다. 중종 때는 반성리로 개칭하고 창고가 있다하여 창말이라고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진주군 일반성면 창촌동, 선동, 채동, 함안군 상사면 다무리 각 일부로서 창촌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창촌리는 창촌, 구리, 시정, 신기, 신촌의 5개 마을로 개편되었다.

창촌(倉村): 고려 현종 및 조선시대부터 창고가 소재한 마을이라 하여 창촌으로 호칭되었다.

가선리(佳仙里): 조선시대에는 반성리 선원동 ․ 가곡 ․ 반월 마을이었다. 1914년 3월에는 진주군 일반성면 가곡동 ․ 선동 ․ 창촌동 각 일부로서 가선리라 하였다. 1963년 10월 1일에 소아 마을이 선동, 가곡, 소아 3개 마을이 되었다.

개암리(開巖里): 1914년, 진주군 일반성면 개암동, 선동, 창촌동, 외진성면 답천동 각 일부로서 개암리라 하였다. 삼국시대 축조된 고분 2기가 개암 뒷산에 있으며 고려말(1392)의 석탑이 절골에 있다. 본시 진주군 일반성면의 지역으로서 개암나무(고욤나무)가 많았으므로 개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채동, 선동, 창촌 등의 각 일부와 외진성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개암이라 하였다.

답천리(畓川里) 1914년, 진주군 일반성면 채동, 외진성면 답천동 각 일부로서 답천리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진성리 노천, 일명 논아곡 양장 마을이다. 본래 진주군 외진성면의 지역으로 논내실 또는 노천, 답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일반성면의 채동 일부를 병합하고 답천리라 하여 일반성면에 편입되었다. 답천리는 답천, 양전 2개마을이다.

운천리(雲川里)

조선시대에는 진성리 원당, 굴천, 포곡이라고 하였다.

고종 1년(1864) 원당은 내진성면으로 편입되고 굴천, 포곡은 외진성면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진주군 외진성면 성분동, 포곡동, 운천동, 내진성면 원당동 ․ 온정동, 함안군 상사면 다무리 각 일부로서 운천리라하여 일반성면에 편입되었다. 운천리는 운천 ․ 원당 ․ 중촌 ․ 상촌 4개 마을이다. 1966년 3월 1일 중촌을 포실로 개칭하였다가 1970년 포실마을을 운천마을로 통합하였다.

남산리(南山里)

조선시대에는 진주목 동면 진성리 남산촌 ․ 대연 ․ 원통 등 이다. 조선조 후기에도 외진성면으로 남산(군산천)밑이 되므로 남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주군 외진성면 원통동․ 사가동 ․ 소야동 ․ 시목동 ․ 남산동 ․ 관사동, 내진성면 백암동, 두목동 각 일부로서 남산리라 하였다.

1950년 남사, 상남, 원통의 3개 마을, 1962년 남사마을을 분동하여 남사 ․ 관동 ․ 시목 ․ 금야, 1970년 관동 남사를 남산마을로 하고 시목, 금야는 금야마을로 흡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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