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정신은 곧 진주인의 기개

김시민 장군이 군사 3천800여명으로 왜군 2만 여명을 물리친 진주성 대첩은 진주 주체정신 발현의 정수이다. 사진=박청기자
김시민 장군이 군사 3천800여명으로 왜군 2만 여명을 물리친 진주성 대첩은 진주 주체정신 발현의 정수이다. 사진=박청기자

조선 정조 때 대사간을 지낸 윤행임(1761∼1801)은 각 도민성(性)을 4자로 풀이했는데 경상도민을 일러 태산교악 설중고송(泰山喬嶽 雪中孤松) 즉, 산악의 모습을 능히 바꾸고 차고 매서운 눈보라를 홀로 견뎌내는 소나무의 절개에 비유하고 있다. 영조 때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대체로 경상우도인을 '낙선호의(樂善好義)’ 즉, 착한 일 하는 것을 즐겨 하고 의로운 일 하기를 좋아한다 했으니 이 고장의 정신적인 평가에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처럼 걸출한 인물들의 출현은 결국 오늘날 진주정신 형성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주정신이란 바로 주체정신, 호의정신, 그리고 평등정신이다.

‘향토가 곧 나라’ 진주 주체정신

우리 역사는 수없이 많은 주변 강대국의 침략과 억압에 의해 사대주의가 싹터왔다. 특히 일제 강점기는 문화 말살정책으로 우리 겨레의 자주 전통이 뿌리째 흔들렸고, 비록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나 주체정신은 간곳없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에서 제대로 된 자주성을 찾아볼 순 없다. 외래상품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외채와 외국자본이 우리 경제를 잠식하고 이제는 우리 글과 우리 말조차 흐릿하게 되었으니 주체정신이 더욱 아쉬운 때다.

하지만 진주는 그와 달라 뚜렷한 주체정신의 역사를 갖고 있다. 1592년 김시민 진주목사는 군사 3천800여명으로 왜군 2만 여명의 공격을 받아 6일간 싸워 물리쳤으니 바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대첩이다. 이듬해 계사년 왜군은 12만 여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략하였는데 11일간 치열한 공방전 끝에 진주성은 무너졌다. 이 싸움에서 삼장사와 성안의 7만여 민, 관, 군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으나 진주인의 기개만큼은 꺾지 못했다. 왜군의 전승연에 참석한 의기 논개는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절함으로써 민족의 꽃으로 산화하였다. 임란을 당했을 때 백성을 보호하고 국토를 지켜야 함은 두말할 것 없이 정부의 일이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부패와 무능으로 이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런 때 나라를 구하려 일어선 의병정신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이어져 오는 이민족에 대한 저항정신이었다. 의병들의 이러한 활동은 상황과 지리적 여건에 따라 조금은 달랐다고 볼 수 있다. 호남 의병은 근왕정신(勤王精神)을 기병 이유로 내세워 향토가 지켜진다고 생각한 반면, 영남 의병은 향토를 지킴으로써 나라가 지켜진다는 향토보위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생성되어 온 진주의 주체정신이라 할 수 있다.

진주성내에 있는 영남포정사문루.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사진=박청기자
진주성내에 있는 영남포정사문루.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사진=박청기자

◈단성소 '호의정신' 형평운동 ‘인간사랑’

남명 선생으로부터 비롯된 호의정신

남명 조식 선생은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 위대한 인물이었다.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 위선을 지양하고 진정한 선비상을 지행일치의 행동유학을 실천함으로써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사의 난맥을 보고 죽음에 맞서 탄핵한 유명한 ‘단성소’는 선생의 이러한 신념을 행동으로 표시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남명 선생은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히 절제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호의 정신과 지행일치라는 실천학문에 힘입어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이라는 나라 위기상황에서 의병을 일으켜 분연히 일어선 것은 선비가 학문에만 힘쓰는 것이 아니고 배운 학문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었다.

이런 호의정신의 흐름은 임술 농민항쟁과 형평운동 같은 민권운동에 동기 부여가 되었다. 조선조 후기 삼정의 문란과 관리들의 가혹한 탄압, 수탈이 유독 진주 고을만 더욱 심했던 것도 아니고 백정이 진주에만 더 많이 거주한 것도 아닌데, 진주에서 민권운동이 먼저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불의를 보고 좌시하지 않는 진주 사람들의 ‘호의정신’에 그 바탕이 있으리라 본다.

진주성 정문 앞에 위치한 형평운동기념탑. 진주에서 일어난 일제 강점기 형평운동은 한결같이 사람의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사진=박청기자
진주성 정문 앞에 위치한 형평운동기념탑. 진주에서 일어난 일제 강점기 형평운동은 한결같이 사람의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사진=박청기자

형평운동의 뿌리는 ‘인간사랑’

고려 민권항쟁 및 임술 농민항쟁과 일제 강점기의 형평운동은 한결같이 사람의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특히 형평운동은 조선사회에서 가장 차별 받던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강조한 우리 나라 최초의 반차별 인권 운동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기본조건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형평정신에는 민족이나 이념을 제일로 내세우는 어떤 주장과 활동까지 뛰어넘는 인류의 영원한 정신인 ‘인간사랑’이 담겨있다. 지금도 우리가 애타게 부르짖고 갈구하는 인간존중과 평등의 숭고한 정신을, 형평사를 조직하고 수행한 선조들은 앞서 지니고 실천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주의 평등정신이다.

진주의 위기 ‘인물 공동화 현상’

이처럼 진주정신은 주체정신, 호의정신, 평등정신을 바탕으로 한 역사에서 형성된 고귀한 정신이다. 그러나 1925년 도청이 일제 침략자들의 수탈 관문이 된 부산으로 이전되고, 해방 이후 격변하는 정치적 변화 과정을 겪으면서 이 지역을 지도할 수 있는 인재들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부산도청이나 서울로 떠나면서 이 지역의 ‘인물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다. 게다가 1960년대 이후 고도로 발달하는 물질 문명에 따라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가치관의 혼돈으로 인하여 진주정신은 침체기를 맞았다.

하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이루어온 진주정신은 쉽게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소멸되어서도 결코 안 된다. 아직도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고귀한 진주정신의 불씨가 남아 있을 것이니 이 불씨들을 다시 모아 영구히 불 태워야 할 것이다. 광복 반세기를 지난 오늘날까지 잔존하는 외세 의존적인 의식을 청산하고, 진주정신의 바탕인 주체정신을 길러야 한다. 또한 알만큼 알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침묵하고 방관하며 파렴치한 행동으로 불법과 불의를 일삼는 현실에서 호의정신이 깃든 사회정의를 실천해야 한다. 끝으로 인간의 기본 권리를 훼손하여 불거진 갖가지 편견과 차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등 아직도 우리 주변에 수없이 존재하는 차별을 물리치는 평등정신도 절실하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둔 오늘 ‘주체, 호의, 평등’이라는 진주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신 분들에게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선 침체된 진주정신을 지방 정부가 재정립, 전승, 확산시켜야 할 것이다. 시민들 역시 이 진주정신을 서로 알리고 실천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극도의 이기주의를 배격해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도시를 만들어 수세기 동안 이어온 진주정신의 맥을 이어받아 늘 푸른 남강 물과 같이 유유히 흐르기를 바란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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