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연합신문 문단-수필

안동원

전 진주문인협회장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한해 겨울 나는 방안에서 수선화와 함께 지냈었다. 맑고 청초한 꽃과 그 향기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서로의 속 뜰을 열어 보인 적이 있다.

노래의 가사처럼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 적막한 그 얼굴’이 내 영혼을 끌어당겼던 것이다. 눈발이 흩날리고 대지가 얼어붙은 한겨울에 피는 꽃이라서인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맑은 기품이 서려 있었다.

법정스님처럼 겨울 내내 수선화를 옆에 두고 지내지는 않지만 시장 꽃가게에서 가장 먼저 겨울을 지나고 얼굴을 살며시 내미는 수선화를 찾아 나선다.

여린 꽃망울은 곧 힘차게 봄을 알리려고 하는 의지가 가득 차 있는 것도 같았다.

봄의 깊 섶에 서서 봄을 기다리는 조급한 마음에서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봄을 맞이하는 데 먼저 찾아나서는 길목은 수선화이다.

수선화는 수선화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풀이고 내한성이며 비늘줄기를 갖는 둥근 뿌리식물로 비늘줄기는 둥근 알 모양으로 그 외피는 검은색이며 하부에는 백색의 맑은 수염뿌리가 난다. 잎은 더부룩하게 모여 선형이며 두껍고 평범한 잎맥을 가지고 있다.

겨울이 지난듯하면 시장에서 수선화를 사다가 집에서 매일 꽃이 필 때까지를 감상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그림과 글씨는 후대에 사모하는 이가 많아 완당탁묵(阮堂拓墨)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탁본이 간행되었다. 그 중에는 수선화부(水仙花賦)의 명문을 특유의 추사체로 쓰면서 몽당붓으로 아무렇게나 그렸다는 수선화 그림이 실려 있다.

추사의 수선화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24살 때 아버지(김노경)를 따라 연경에 가서 처음 이 청순한 꽃을 보고 신선한 감동을 받고는 그 뒤부터 즐겨 완상하였다. 그리고 추사 나이 43세 때 일이다. 추사는 평안 감사로 재직 중인 부친을 뵈러 평양에 갔다가 때마침 연경에 다녀오는 사신이 평안감사에게 수선화를 선물하자 아버님께 그 것을 달라고 하여 짐꾼을 시켜 남양주 여유당에 계신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보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다산은 기쁜 마음에 ‘수선화’라는 시를 지었다.

신선의 풍모에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우리 집에 왔다.

지난날 이기양이 사신 길에 가져오더니

추사가 또 대동강 가 관아에서 보내주었다.

어린손자는 처음 보는지라 부추 잎 같다고 하고

어린 여종은 마늘 싹이 일찍 피었다고 놀란다.

그리고 시 끝에 부기로 적기를 추사가 보낸 수선화의 화분은 고려청자였다고 했다.

추사는 다산을 그토록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리고 1840년 추사 나이 55세에 유배의 형벌을 받고 제주도에 와 보니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 수선화였다. 그러난 농부들은 보리밭에 나 있는 이 아름다운 꽃을 원수 보듯 파버리고 소와 말 먹이로 삼고 있는 것이었다. 추사는 하나의 사물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런 딱한 일을 당하고 만다면서 처량한 감회가 일어 눈물이 나는 것을 금치 못하겠다며 애잔한 시 몇 수를 지었다. 그때 추사는 자신의 처지를 이 버림받는 수선화에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추사의 수선화 그림에는 청초하면서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가 서려 있다.

집 근처 대학의 자그마한 호숫가에 수선화가 둘레를 치고 있어 아침햇살에 수선화 물그림자에 노니는 금붕어 떼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이 아름답기도 하다.

이렇게 수선화가 가져오는 봄은 마음에서 뿐만 아니라 내 명함에도 노란 수선화 꽃을 넣어서 가슴에 지니고 다닌다.

수선화를 기다리는 봄은 선인들뿐 아니라 수선화의 그 고고한 자태와 청순하고 신선함에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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