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전쟁 황석산성대첩 25)

황석산성 대첩은 임진전쟁 7년 중 가장 많은 일본의 지상군이 궤멸된 전투로 일본인들이 끝까지 숨기도 싶은 특급비밀이다.. 5일간의 전투에서 우군 7만5천 3백 명 중 2만7천 명만이 전투가 가능하고 48,300명이 전사 또는 부상자로 전투력을 완벽하게 상실한 전투로 일본인들이 기록한 내용이다. 그 증거는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의 황석산성 일본군의 전투편성표』, 『일본국사대사전의 기동로』, 『전주성에서의 깃가와히로이에의 코베기 보고서』, 종군승 멘고렌조보의 『고려일기(高麗日記)의 1〜2차 재편성표』와 『나베시마나오시게가문의 기록』 등이 7만5천여 명의 참전을 증명하였고 2016년 11월 16일 함양군문회원의 황석산성 학술회에서 황석선성을 공격한 우군이 7만5천3백 명이 편성되었다, 라고 제도권 역사학계의 해양대학교 김강식교수가 사실을 밝힘으로써 증명이 되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은 학술회를 통하여 전문가들이 신속하게 보완하여 주기를 당부 드린다.

황석산성을 공격한 우군은 전주성을 거쳐서 북진하여 조명연합군이 전라도 방면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황석산성에서 전투의 주력군이 70% 이상이 상실되어 그들의 임무인 조명연합군을 차단을 할 수가 없어 남원성을 공격하여 승리한 좌군이 북진을 하는 바람에 고니시가 주둔하던 순천을 제외한 전라남도는 전주성[입성하는 8월 20일부터 9월19일까지 30여 일간 군사적으로 빈 공간이 되어 이순신 장군이 고문의 후유증을 견디면서 하루에 300리길이나 이동하면서 인적 물적 보충을 하면서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명량전투를 준비하는데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주성 입성 후부터 지상군의 총대장이 된 우기다 히데이에가 9월16일에 있었던 이순신의 명량전투 소식을 전남 보성에 도착하는 9월19일에야 들었다. 우기다 히데이에이는 이순신의 명량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에는 전북김제에서 패퇴한 나베시마나오시게부대를 위로하고 전북익산용안현에서 했던 1차재편성을 취소하고 전라북도는 위험하다고 하여 정읍애서 전라남도로 부대를 재배치하는 2차 재편성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황석산성에서 8월18일 일본지상군이 궤멸되고, 9월16일 명량전투로 보급로가 끊어진 일본군은 전라도에서 철수하여 경상도 바닷가 왜성으로 돌아감으로서 4도 분할이라는 정유전쟁의 목표를 상실하였고 풍신수길에게는 소득 없는 7년간의 전쟁을 포기케 하였으며 전쟁의 참패로 지친 풍신수길은 1597년10월부터 헛소리 하다가 고황(膏肓)병이 들어 1598년 7월17일에 죽고 일본군이 철수를 함으로서 풍전등화였던 조선이 다시 살아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결과 명나라는 망하고 일본은 평수길의 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가 집권하는 등 정치에 큰 변화와 영향을 미쳤으나 전쟁 당사국인 조선만이 유명개의 만인평등의 사상은 묵살되어 백성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또다시 백성을 착취하는 태생적양반사회로 돌아감으로서 정유전쟁 과 1636년 12월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에서 또다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하였고 태생적인 신분사화에 대한 분노로 1728년 3월28일 동방오현 중의 한사람인 안음현위천 동계 정온(鄭蘊)의 증손인 정희량(鄭希亮)의 거창거병사건 역시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명분으로 수백여 명이 처형되고 천여 명을 귀양을 보냈고 100여 년간 안음현 사람들의 벼슬길을 박탈함으로서 유명개의 만인평등사상은 물거품이 되었고 300여 년 만에 제국주의로 다시 침략한 일본군은 1597년 황석산성에서 궤멸된 역사적 복수로 1914년 3월1일 안의군을 파군하여 안의면으로 강등을 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석산성을 공격한 코베기 대장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의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탄이 터져 일본이라는 나라는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1914년 3월1일 파군되어 강등당한 억울한 안의군은 아직도 조선총독부의 행정명령 그대로 안의면으로 남아 분노(憤怒)의 도시(都市)가 되어 있다. 백성이 자신의 땅에서마저 자유롭게 살수 없도록 하고 7천여 명의 코를 베어 죽였고 수백여 년 거듭되는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역사의식도 없고 땅이나 파고 뒤집는 것을 최고로 아는 맹랑한 산돼지 같은 군주가 다시는 등장하지 않기를 바란다.

1946년 4월21일 어떠한 억압이나 귄위의 지배도 없는 진정한 자유와 평등, 정의와 인도의 가치를 지향하는 600여명의 아나키스트(anarchist) 창립총회를, 분노(憤怒)의 도시 안의면 심진동(尋眞洞)에서 개최하고 정부수립의 원칙을 선포하고 독립노농당을 창당하였으며 아나키스트 인재양성을 위한 안의중학교를 설립함으로서 안음현이 민주화를 위한 진보사상의 성지로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우연이아니라, 모두가 유명개의 만인평등의 사상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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