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연혁(沿革)

조선조 전기까지는 진주부 동면 대곡리 · 오곡리, 그리고 북면 사죽리 · 설매곡리 · 월배곡리 · 임옥리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월매곡 · 임옥곡· 미곡리는 설매곡리에, 옥곡리는 대곡리에 합하여 대곡리 · 설매곡리라 하였다.

2. 지명유래(地名由來)

용암리(龍岩里)

용당골: 용암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 안에 채정승 묘가 있다. 묘에 있 던 석물을 없애버려 후손이 서울에서 말을 타고와서 묘를 찾지 못하고 그 밑에서 절만하고 돌아갔다고 하는 설화가 있다.

부치골: 부처골. 옛날 부처가 나왔다고 하여 부처골이라 한다.

꺼떡바우: 용당골 돌구재로 가는 길목에 있다. 흔들면 꺼떡 꺼떡 한다고 한다.

포리대가리: 꺼떡바위 위에 있음. 꺼떡바위 위에 파리가 앉아있는 형태라고 한다.

비네바우: 꺼떡바위 옆에 비네같이 생긴 바위이다.
니우재: 의우령 용대이에서 미천면 어옥리로 가는 고개. 옛날 용댕이와 늘억실 사 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단판을 지었다고 한다.(문재의 고개)

상투바우: 천황산 먼당에 있음. 의령군에 있는 사람이 상투바위를 쳐서 무너뜨리니 바위에서 피가 솟아났다고 한다.

구시평정: 구시평정 용덤에서 약 300m 서쪽으로 산먼당에 있다. 용덤에서 용마가 나서 구시평정(소 구시같이 생긴 곳)에서 죽을 먹고 살다가 주인을 기다 렸으나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주인을 찾아 달비실, 던진동, 풍덤이로 돌아 다녔다가 다시 용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월암리(月岩里)

달비실: 달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달배, 달비라고도 한다.

도롱골: 월배에서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문터: 대방산 기슭에 있으며 옛날에 문씨들이 살았기 때문에 문터라고 하며 지금도 밭에서 두꺼운 기와조각이 나오기도 한다.

꼬구랑정지: 마을 앞에 옛날 꼬꾸랑 큰 정자나무가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고목으 로 자연히 고사하여 없어졌다.

말바우: 마암곡 안에 말모양으로 생긴 바위이다.

월암: 덕촌 달배실, 샛터, 교동, 곡정 땀을 통털어 월암리라 한다.

설매리(雪梅里)

상촌: 설매마을 북쪽에 있으며 굼투물, 먼당골, 안땀, 대추나무골, 돌바, 새몰 등을 합하여 상촌마을이라 한다.

설매: 용짓골, 덕구, 행정, 삭곡, 소정, 임계정 말머리 등의 땀을 통털어 설매마을이 라 한다. 고려 때에는 저곡이라 하였고, 후에 설당동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강씨가 이주했는데 강심이라는 분이 눈이 내릴 때 매화꽃이 피었다고 하여 설매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삼백골: 마을 동쪽 앞산 너머에 있는 골짝이다. 설매 저수지에는 북쪽이다. 임란 때 병장 강덕룡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며 그 후에 사람이 이주 하여 삼백석을 한 거부가 살았다고 전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재비당골: 설매저수지에서 동남쪽에 있다. 임란 당시 정씨부부가 왜놈에게 쫓기다가 붙잡혀 부군은 학살되고 잡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비당골: 정문터에서 동쪽골짝이다. 부군이 그 자리에 학살되고 부인이 치욕을 생 각하면서 새비라는 풀잎으로 가슴을 잘라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후에 선 조대왕이 이 열녀 표상을 하사하였다.

광석리(廣石里)

북창: 감나무골, 개애골, 뒷골, 독매 땀을 통털어 북창이라 하고 대곡면의 중심지역 으로서 대곡면사무소, 경찰지서, 농협, 우체국, 교회, 시장 등이 있다.

유곡리(楡曲里)

모시골:옛날 저곡이었다. 옛날 어정승의 묘가 있어 못을 파서 모싯골이라 한다. 지 금은 취락지구로 문화주택의 마을이 되었다.

단목리(丹牧里)

단목: 단동 · 단지동이라 하였다. 설에 의하면 옛부터 우리 선조는 의를 먼저 생각 하였다. 의는 곧은 마음이란 뜻으로 의를 숭상하는 마을이라 하여 단동이라 하였고, 단지동이라 한 것은 동리 안에 붉은 연못이 있어 단지동이라 칭했다 한다.

마걸둑천: 마구둑천, 지내에서 흐르는 또랑물과 느릿골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지 점인데, 넓은 구도가 있어 옛날 말을 매든 곳이다. 이 도로가 현재 단목초 등학교 화단을 따라 지방도와 연결된다.

하마비: 당구정 앞에 있음. 옛날 단목마을 앞을 지날 때 임금의 어필과 여를 경모 재에 모시고 있다하여 하마하도록 세운 비이다.

월아리(月牙里)

북쪽은 단목리, 동쪽은 금산면, 남쪽은 집현면, 서쪽은 미천면을 접하고 있다. 총 가구는 92호이고, 인구는 432인(남:213 여:219)이다.

와룡리(臥龍里)

조선조 전기 때는 진주목 동면 오곡리에 속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대곡리에 병합되어 구한말 때까지는 대교면에 속하였고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유곡동, 용동, 가정동, 대여촌면 송곡동, 설매곡면 가야동 각 일부를 병합하여 와룡리라 하고 대곡면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봉평, 유곡, 송곡 마을을 와룡리라 한다.                                                                                  향토사학자 권영철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