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호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 27

1967년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에서는 황석산성에서 일본우군 75,300명이 궤멸된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조작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 왜곡은 1597년 그 당시가 아닌 일본제국주의 시대인 1910년11월 조선의 구제도와 구관습을 혁파한다는 명분아래 헌병을 앞세워 조선의 역사서를 모두 수거하여 수정할 수 있는 것은 수정하고 수정할 수 없는 것은 불태웠던 조선사편수회 사건 이후의 일이다.

2016년 11월 16일 함양군 학술회에서 해양대학교 김강식 교수가 임진전란사의 1002〜1007페지를 인용하여 제시한 것인데 이를 살펴보면 『모리데루모도의 우군은 합천에서 거창으로 진출하여 전열을 정비한 후 <①주력은 안의를 거쳐 육십령을 넘어 진안으로 향하고> <②일부병력은 별군을 편성하여 안음에서 함양과 운봉을 거쳐 남원으로 향하게 하여 산속에 있는 은닉되어 있는 곡식을 수색토록 하였다.> <③가도오기요마사는 안의에서 육십령으로 향하던 중, 안의, 거창, 함양의 군민들이 황석산성에 집결되어 있는 것을 알고 황석산성을 공격하였다.』 라고 하여 일본군이 중간목표인 황석산성 직전에서 적전분열(敵前分裂)을 하였다라고 하였으나 군사상식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분석해 보면 우군의 본대 주력군이 전주성에 이르는 중간에서 식량을 공급받아야 하는 곳으로 1597년 4월18일 거창에서 체포된 3명의 첩자에 의해서 그들은 황석산을 정탐하였다는 사실이 탄로가 난 것이다. 체포된 간첩은 세 명이지만 잡히지 않고 정탐에 성공한 첩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수십여 명의 첩자를 보내 조사를 하여 중간목표로 확정한 황석산성을 주력군이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라고 하는 것은 황석산성에서 가장 크게 궤멸당한 모리데루모도 3만 명과 조오소가베모도지가군 1만3천3백 명, 구로다나가마사군 5천 명을 누락시키려는 수작이다. 1887년도에 창간한 일본국사대사전에서 모리히데모도와 3만 명이 천안으로 올라갔다고 하는 것과 거창에서 재편성을 하고 우군의 본대는 황석산성을 공격하지 않고 지나갔다라고 하는 것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그 후에 그들이 어디로 갔고 무엇을 했는지 투입과 산출이 전혀 일치되지 않는 엉터리다. 일본군 3만명이 천안으로 갔다면 천안에서 큰 싸움이 벌어져서 성이 무너졌다든가, 아니면 3만 명이 유령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는지,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 졌는지? 등등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는데도 조선의 사학자들은 왜 그것을 아직도 믿고 있는지 안타깝다. 이것은 일본의 정규군이 조선의 부녀자, 노약자들에게 대패를 했다는 것과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모도지가 두 장군이 식물인간이 되어 이듬해 3월 일본으로 철수를 할 때까지 거의 8개월 동안이나 지휘능력을 상실한 것과 병력 4만8천3백 명이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여 완벽하게 궤멸당한 흔적을 감추고 황석산성 대첩의 흔적을 지우려는 총독부의 꼼수작전이다,

또한 남원에서 우가디히데이이의 좌군이 작전을 하고 있는데 남의 작전지역을 또다시 우군이 들어가는 것은 군사상식을 벗어나는 얘기다. 그래서 황석산성전투 참전 일본군을 가도오 1만 명, 나베시마나오시게 1만2천 명, 구로다나가마사 5천 명 등으로 황석산성에서 살아서 도망간 2만7천명으로 축소하기 위하여 거창에서 적전분열을 한 것처럼 조선총독부가 작심을 하고 왜곡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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