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선호
황석산성 연구소장
황석산성 (백성의전쟁 황석산성대첩 27-2)

또한 1597년 4월18일 황석산성을 정탐하는 일본의 첩자 3명이 거창에서 체포될 정도로 수십여 명의 첩자를 운용하여 사전 충분한 정보를 수집한 후 작전을 하는 중인데 전쟁의 신이라고까지 추켜세웠던 가도오가 황석산성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육십령을 올라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황석산성을 공격하는 어리석은 장수로 매도하는 것은 지극히 조잡한 날조다.

1910년대 대한민국을 다시 침략한 일본군은 황석산성 대첩의 역사적 사실에 경악을 했을 것이다. 오래 동안 일본의 통일 전쟁에서 잘 훈련된 7만5천의 일본 정규군이 군인도 아닌 조선의 부녀자와 노약자, 농민, 가노들에게 궤멸을 당했다는 사실과 일본의 중신이여 1,205,000석의 영지를 가진 히로시마(廣島)성주요, 당시의 정치실세인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와 조오소가베모도지가 두 장군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기록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1910년 11월부터 구관습과 구제도를 혁파한다는 명분으로 헌병을 앞세워 조선의 사서(史書)들을 모두 수거하여 검열하고 수정하고 수정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불태웠으니 불에 탄 역사서가 30만권이나 되었고 태우지 못하고 가져가서 일본의 왕실도서관에 보관된 조선의 역사책이 가득하다고 한다.

먼저 안음현민들이 지내던 황석산성 순국선열들에 대한 제사행위를 못하도록 하였고 조선 숙종 40년에(1714년) 건립된 당본리 황암동에 위치한 황암사(黃岩祠)를 불태웠으며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지원하고 조선을 구한 황석산성 대첩을 기획하고 전투준비를 했던 웅장한 안음현청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안의초등학교를 지어 현청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또한 1914년 3월1일 1815년 이래 100여 년간 행정구역상 군(郡)이었던 안의군을 마리, 위천, 북상면은 거창군으로, 안의, 서하, 서상면은 함양군으로 복속시켜 황석산성이 존재하는 안의군(安義郡)을 파군(破郡)하여 다시는 일어 설 수도 없고 도전도 하지 못하도록 전투의 흔적과 황석산의 저항의지를 말살하려고 조선총독부는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일본인들은 당시 황석산성 대첩을 치렀던 일본군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의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일본국사대사전을 조작했다.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우군대장은 황석산성전투에 오지도 않았다라고 했으며 그의 사촌이며 양자이며 부하였던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를 등장시켜 우군대장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면서 거창에서 우군을 재편성하여 우군의 본대가 천안으로 올라간 것으로 일본군의 기동로를 삽입하여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가 3만 명을 이끌고 천안(天安)까지 올라갔다라고 기록했지만, 일본(日本)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이 1887년도에 창간이 되었기 때문에 황석산성 대첩의 왜곡은 1597년 그 당시가 아니라 1910년대 조선사편수회사건 당시에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고 일본의 국사대사전까지 마음대로 조작을 했다는 것은 황석산성 대첩 흔적지우기에 조선총독부가 깊숙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일본인들이 조작한 내용을 조선인의 입장에서 재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대로 믿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다시 한 번 더 거창에서 일본군이 적전분열 상황을 잘 살펴보기를 바란다.

『모리데루모도의 우군은 합천에서 거창으로 진출하여 전열을 정비한 후 주력군은 안의를 거쳐 육십령을 넘어 진안으로 향하고 일부병력은 별군을 편성하여 안음에서 함양과 운봉을 거쳐 남원으로 향하게 하여 산속에 있는 은닉되어 있는 곡식을 수색토록 하였다.

가도오기요마사 안의에서 육십령으로 올라가다가 안의, 거창, 함양의 군민들이 황석산성에 집결되어 있는 것을 듣고 돌아와서 황석산성을 공격하였다.』 라고 임진전란사에 기록했는데 황석산성이라는 중간목표 앞에서 재편성을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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