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27-3)

 

일본국사대사전상의 일본군 기동로

 

일본 우군이 경남의 거창에서 중간 목표인 황석산성을 앞에 두고 적전분열을 하는 재편성을 실시하여 본대는 황석산성을 지나서 먼저가고 뒤를 따르던 가도오기요마사가 육십령 고개를 올라가다가 황석산성에 안음거창함양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와서 공격을 하였다라고 조작하였다. 일본국사대사전은 1887년에 창간을 하였기 때문에 국사대사전의 기록은 1910년대에 했다는 것이 증명되고 이러한 조작에 총독부가 깊이 관여하였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또한 1597년 4월18일에 거창에서 일본첩자를 체포했는데 취조한 결과 황석산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것이 들어났다. 따라서 가도오기요사가 황석산성을 모르고 지나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 자료 하나만으로도 임진전란사의 황석산성 전투는 조작이라는 사실이 증명이 된다. 지도상의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는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의 사촌이고 양자(養子)이며 부하다. 3만명이 올라는 갔는데 내려온 흔적이 없으니 그들은 지금도 천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 당시 毛利秀元는 毛利輝元의 3만 명중 기동력이 있는 2천명을 이끌고 구로다의 5천명의 일부로 직산전투에 참여 중이었다. 
 

내용을 분석해 보면 우군으로 편성된 7만5천3백 명이 거창까지는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창에서 재편성을 하여 모리데루모도 대장군 3만 명과 조오소가베모지가 군 1만3천3백 명 구로다나가마사 5천 명 총 4만8천3백 명은 본대로 편성되어 황석산은 들리지도 않고 그대로 통과를 하고 2만7천명만이 황석산성에 참전한 것으로 조작하고 있다.

1985년 황석산성 추모위원회를 발족하여 황석산성이 함락된 음력 8월18일을 기일로 정하여 파군되어 쇄락한 안의면 단위의 외롭고 쓸쓸한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1987년 문화재 관리국으로부터 사적 제322호로 지정받았고 지방민의 헌성으로 2001년 서하면 황산리에 사당을 복원하였다. 그러나 곳곳에 황석산성을 공격한 일본군은 75,300명인 아니라 27,000명이라는 엉터리 기록물을 세워 놓고 추모제를 지내면 누구를 위한 추모제인가? 일본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키우려는 식민사관이다. 2만7천 명의 일본군은 한명도 죽지 않고 조선인만 죽었다는 것을 1910년부터 지금까지 100여 년이나 믿어왔고, 앞으로도 그대로 믿는 당신이 학자라면 식민사관에 푹 빠져 헤어 날 길이 없는 식민사학자요, 일반인이라면 황국신민이다. 일본인으로 무장되고 세뇌된 뇌를 조선인으로 탈출을 시키려는 끈질긴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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