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명 기병으로 5백명 물리쳐

정기룡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경북 상주시 충의사. 1974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고, 1978년 호국유적 정화 사업으로 당초 16.5m²에 불과했던 사당을 약 13,223m² 부지에 확장 정비한 호국사상 성지다. 자료사진.
정기룡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경북 상주시 충의사. 1974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고, 1978년 호국유적 정화 사업으로 당초 16.5m²에 불과했던 사당을 약 13,223m² 부지에 확장 정비한 호국사상 성지다. 자료사진.

선조 ‘기룡’ 이름 하사하다

정기룡의 자는 경운이며 초명은 무수다. 1586년 10월26일 기룡이 무과급제를 하여 합격자를 발표할 때 선조 임금이 잠깐 졸아 꿈을 꾸니 용이 종로거리에서 일어나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종로거리에 나가 살펴보라 했는데, 곧 거기 있던 사람을 데리고 왔다. 임금이 기이하게 여기고 기룡이란 이름을 하사해 그의 이름이 기룡으로 바뀌었다.

‘돌격장’ 정기룡

1592년 임진년에 왜적이 동래로부터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고을을 연속으로 함락시키자, 관찰사 김수와 장수 박홍, 이각 등이 그 세력을 보고 도망쳐 모두 무너져 버렸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이일 장군을 순변사로 삼아 중도(中道)로 내려가라 명령하고, 성응길 장군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로 내려가라 하였으며, 조경 장군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도(西道)로 내려가라고 했다. 

당시 조경이 영남으로 내려갈 때 정기룡이 무과급제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따라 내려가기를 요청하였다. 조경이 여러 장수들에게 싸울 계책을 물었는데 정기룡이 나서서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왜적은 계책을 쌓아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날카로운 병력과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아주 뛰어난 말과 기마에 능통한 재주를 가진 사람을 뽑아 기병(奇兵, 적을 기습하는 특공대)을 만들어 맨 앞에 배치하는 것이 좋습니다.  곧 적을 만나면 이 기병들로 하여금 적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는 사이에 충격을 가하게 하고 이어 보병이 그것을 틈타 소리치고 기세를 올려 도와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기게 됩니다.” 

조경이 이 계책을 아주 훌륭히 여겨 정기룡을 돌격장으로 삼았다.

이 무렵 적병이 김해를 거쳐 우도로 들어왔다. 정기룡이 홀로 10명 기병을 거느리고 앞서서 진격하여 거창의 신창에서 적의 선봉군 5백명을 만났다. 여러 부하들이 웅성거리며 두려워하는데, 이 때 정기룡이 말에 껑충 뛰어 올라 앞서 내달아 몸소 칼을 휘둘러 백여 명의 적을 무찌르니, 드디어 이를 본 군사들이 다투어 진격하여 적을 격파했다.

그리고 적들이 계속해 성주와 개령을 함락시키고 금산에 이르렀는데 조경이 추풍령에 도달하여 적과 싸워 패하여 달아나다가 왜병에게 사로 잡혔다. 이에 정기룡이 껑충 뛰어 쫓아 들어가 그 왜병의 목을 베고 조경을 빼앗아 겨드랑이에 껴안고 돌아왔다. 적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모두 다 흩어져 쓰러졌다. 전쟁이 벌어지고 처음으로 조선군이 육전에서 거둔 승리였다.

문찬인 하동 향토사연구소장 / 정기룡장군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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