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의 독도
광복 이후의 독도
  • 경남연합신문
  • 승인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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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독도 Ⅴ

1.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 회복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한국은 독도를 포함한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유엔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들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돼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또한 1945년의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확인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섬과 우리(연합국)가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한 한다” 라고 규정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 그에 기초하여 1946년 1월 29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각서(SCAPIN) 제677호를 통해 일본의 통치와 행정권이 미치는 범위를 앞에서 열거한 4개 섬과 그 주요 부속도서로 한정하고, 독도를 울릉도, 제주도와 함께 일본의 영토범위에서 제외되는 도서로 명시하였다.

또한 일제의 침략 및 전쟁 책임과 영토의 범위를 규정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의 제2조 (a)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조약문에 독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1905년에 자국 영토로 편입한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어떤 조약인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패전국’인 일본에 대해 연합국이 주권을 회복시켜 주는 조건으로 여러 가지 제한을 두었다. 즉 패전국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지 권리를 인정하는 성격의 조약이 아니다. 그야말로 승자와 패자 간의 강화조약인 것이다. 따라서 영토에 관한 규정도, 침략의 결과로 팽창한 영토를 최소한의 원래 일본 영토로 축소시키고 ‘제한’하는 것이다. 이것이 카이로 선언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일관된 원칙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자신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주장하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이 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에는 이미 한국 정부가 수립되어 독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주권국가인 한국의 영토 범위를 규율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독도 폭격사건과 한국의 평화선 선언

미군정 말기인 1948년 6월 8일에 독도에서 미 공군의 연습 폭격으로 우리 어민 14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독도는 1947년 9월 16일자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에 의해 미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되어 있었다. 사고발생 후 미군 당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을 하였다. 1950년 6월 8일 한국 정부는 독도에서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제막식을 가졌다.

그러나 미군의 ‘폭격연습’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1952년 9월 15일, 22일, 24일에 걸쳐 연달아 폭격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단장 홍종인)이 독도에 접근하여 상륙하려고 할 때마다 폭격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독도에 상륙하지 못하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폭격은 단순한 군사훈련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1952년 1월 18일에 대한민국 정부는 4개조로 구성된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국무원 고시 제14호, 일명 평화선 선언)을 공포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 및 1945년에 설정된 맥아더 라인의 폐지에 따라 일본 어선이 우리나라 해역으로 몰려들 것이 예상됨에 따라 취해진 조처로서, 수산물과 광물을 비롯해서 한반도와 그 주변도서의 인접 해양에 있는 모든 자연자원에 대한 우리나라의 권리를 천명하고 해양 경계선을 획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평화선은 당연히 독도 외곽으로 그어졌다.

그러자 일본은 노골적으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며, 한국 정부의 평화선 선언에 대한 대책논의에 착수했다.

1952년 5월 23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야마모토 도시나가 의원(山本利壽)은 이시하라 간이치로(石原幹市郞) 외무차관에게 다음과 같이 질의했다. “이번 일본의 (미군) 주둔군 연습지 지정 문제와 관련해서 다케시마(독도) 주변이 연습지로 지정된다면, 이 영토권을 일본의 것으로 확인받기 쉽다는 생각에서 외무성이 연습지 지정을 바라고 있는가?” 이에 대해 이시하라 외무차관은 “대체로 그런 발상에서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1952년 7월 26일 미일합동위원회에서는 독도를 미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하고, 일본 외무성은 당일로 외무성 고시 제34호를 통해 이 사실을 공시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미군은 9월 중 세 차례의 독도 폭격연습을 단행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53년 7월 13일 외교문서(구술서)에서 독도 폭격사건을 독도 영유권 주장의 논거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정황들을 감안할 때 독도 폭격사건은 일본이 6・25전쟁으로 한국이 혼란한 틈을 이용해서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인정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군을 끌어들여 계획한 결과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한국 외무부는 독도 폭격사건에 대해 1952년 11월 10일에 주한미국대사관에 공문을 보내어,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폭격사건의 재발방지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12월 4일 주한미국대사관은 한국 외무부에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그 후 미 극동군사령부는 독도에 대한 폭격연습을 중지하였고, 1953년 3월 19일에 열린 미일합동위원회에서 독도를 폭격연습지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미국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토주권 주장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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