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돌은 형태가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족두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자웅석이라 하며, ‘운돌’혹은 ‘명석(鳴石)이라고도 한다. 이 돌이 ‘운돌’이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정비하였다. 이때 공사에 동원된 광제암(廣濟庵)의 승려가 공사를 끝내고 절로 돌아가다 이곳에서 급히 굴러오는 돌 한 쌍을 만났다. 승려가 “영혼도 없는 돌이 어디를 가느냐”라고 묻자, 돌은 “진주성 공사에 고생하는 백성을 도와 성돌(城石)이 되려고 간다.”라고 하였다. 이에 승려가 “성은 이미 다 쌓았다.”라고 하자. 돌은 그 자리에 서서 크게 울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승려가 이 돌을 ’보국충석(報國忠石)이라 하여 아홉 번 합장배례(合掌拜禮)하고 떠났다 한다. 그 이후에도 이 돌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사흘 동안 크게 울었다고 한다.

원래 이 자웅석은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빌던 선돌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현실적 고통을 덜어주고 안녕을 가져다 주는 역할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이 운돌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자웅석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민간의 숭배 대상도 그 기능이 변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3월 3일이 되면 자웅석 앞에서 나라와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거행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