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삼국시대 후기 백제 거열성으로 역사무대에 등장
통일신라때 신라에 병합된 후 고려태조 왕건이 진주라는 명칭 처음 사용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역사는 지나간 일들의 기록이면서 현재에도 쉼 없이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의(義)와 충(忠), 문(文)과 예(藝)를 중시한 진주 역사는 무려 1300년을 헤아려 지금에 이르렀다. 지배층의 수탈과 탐학에 맞선 민란이 두 차례 있었고, 김시민 장군이 이끈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역 최고 예술제로 일컫는 개천예술제는 올해로 67회째를 맞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창간을 맞아 본지는 시내외 100만 진주 출신인들이 진주 역사와 문화를 인문학적으로 마주할 수 있도록 ‘진주 역사 문화 찾기’를 기획했다. 연재를 위해 진주 지역 역사, 문화 전문가 5명으로 위원회를 구성, 매주 관련 글 1편씩을 게재해 나갈 예정이다. – 편집자 주

풍광이 아름다운 도농복합형 도시 진주시는 동쪽으로 함안군, 서쪽으로 하동군, 남쪽은 고성군, 북쪽은 산청군과 의령군을 접하고 있다.
풍광이 아름다운 도농복합형 도시 진주시는 동쪽으로 함안군, 서쪽으로 하동군, 남쪽은 고성군, 북쪽은 산청군과 의령군을 접하고 있다.

진주시는 한반도 남부에 자리잡고 영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지리산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도시 안으로 남강이 휘돌아 흐르고 있으며 남해 바다와도 가깝다. 풍광이 아름다운 도농복합형 도시로 산과 들, 강과 호수, 바다가 어우러져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했다. 그런 이유로 지주계급이 번성했다. 지주계급과 풍부한 물산은 자연스럽게 음식과 놀이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북평양 남진주라 일컬러질 정도로 기생문화가 발전한 이유이다.

진주는 행정적으로 동쪽에는 함안군, 서쪽으론 하동군, 남쪽은 고성군, 북쪽은 산청군과 의령군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712.84km², 인구는 약 36만 명이다. 행정구성은 1읍, 15개동, 15개면으로 되어있으며, 장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 성장해왔다. 현재는 첨단산업단지가 입지한 문화산업도시이며, 또한 혁신도시로서 '물의 도시'로도 불리고 있다.

 

◇ 진주(晉州)는 농사가 잘된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

- 원래 진(晉)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64괘(卦) 중   (坤: 땅)과  (離: 번창)의 의미로 표기됨으로써 진주라는 도시는 일찍부터 명성지지(明盛之地)로 풀이되어왔다. 그리하여 고대 진주는 태양이 적당하게 비쳐서 농사가 아주 잘되는 지역으로 알려졌다.

◇ 삼국시대 후기 백제 거열성으로 진주의 역사 시작

진주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서부 경남의 젖줄인 남강유역을 따라 지수면 승내리와 대평면 내평리 석기산포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진주인근 지역인 수곡면·금산면·금곡면·대평면에서 신석기 유물이, 유곡동(진주), 대평면·집현면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적으로 보아 진주지역에서는 적어도 B.C 2000년경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기 42년경의 가야시대에는 가야연맹의 고령가야로 추정되고, 삼국시대 후기에 와서는 백제 영역 안에서 거열성으로 불려지다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685년(신문왕 5) 9주를 정비하면서 거열주를 청주(菁州)로 고치고 총관을 두었다. 그리고 757년(경덕왕 16) 전국의 지명을 고치면서 청주를 강주(康州)로 개칭하였다. 799년(소성왕 1) 강주를 다시 청주로 개칭했고 825년(헌덕왕 17) 청주를 다시 강주로 고치고 강주도독을 두었다.

 

936년(태조 19) 후백제의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고려에 영속되었고, 940년 강주를 진주로 개칭하였다.
936년(태조 19) 후백제의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고려에 영속되었고, 940년 강주를 진주로 개칭하였다.

◇940년 고려태조 왕건이 진주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

936년(태조 19) 후백제의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고려에 영속되었고, 940년 강주를 진주로 개칭하였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진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 5월 12목을 13절도사로 개정되면서 진주정해군절도사로 개칭, 9월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는 가운데 산남도에 영속되었고, 영이 설치된다.

1171년(명종 1) 경상주도와 진협주도로 양분된 진협주도에 영속되었으며 1186년 통합된 경상주도에 영속되었다. 1204년(신종 7) 경상주도가 경진안동도로 개칭되었고 1298년(충렬왕 24) 경진안동도가 경상진안도로 개칭되었다. 1314년(충숙왕 1) 경상진안도가 경상도로 개칭되고 1379년(우왕 5) 진주성이 축성되었다.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66년(세조 12) 지방조직으로 진주에 경상도우부 진주진관을 두었다. 1519년(중종 14)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진주목은 경상우도에 영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가운데 진주는 진주부의 영이 설치되어 관찰사를 두었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고쳐져 군수를 두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가운데 진주는 진주부의 영이 설치되어 관찰사를 두었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고쳐져 군수를 두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가운데 진주는 진주부의 영이 설치되어 관찰사를 두었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고쳐져 군수를 두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국을 317군에서 218군으로, 4,315면을 2,517면으로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주군을 부화곡면에 이속, 함안군의 상봉면·하봉면·상사면을 편입하였다. 1931년 4월 진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32년에는 진주읍 소관인 7동 3리가 17정으로 개편되었고 이 때 진주군은 1읍 18면을 소관하였다. 1939년 10월 1일 진주읍이 진주부로 개편 승격되고 부윤을 두었다. 진주군은 진양군으로 개칭되었고 이 때 진주부는 17정 12이를 소관하였다.

촉석루 전경. 사진=박청기자
맑은 날 촉석루 전경. 사진=박청기자

◇1949년 지방자치법의 시행으로 진주시 탄생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의 시행으로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 시장을 두었다. 또한 종래의 17정 12리가 37동으로 개편되었다. 1973년 7월 1일 진양군 정촌면 가좌리·호탄리, 내동면 귀곡리가 진주시로 편입되었다. 1990년 3월 22일 망경남·북동을 망경동으로, 상봉동·서동을 상봉동으로, 수정남·북동을 수정동으로, 옥봉남·북동을 옥봉동으로, 상평동·서동을 상평동으로, 초전남·북동을 초전동으로, 이현남·북동을 이현동으로, 판문남·북동을 판문동으로 통합하였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진양군과 진주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진주시가 되었다. 그리고 3월 1일 문산면이 읍으로 승격, 10월 17일에는 문산읍 동물리를 두산리로, 갈촌리를 갈곡리로, 진성면 중촌리를 동산리로, 이천리를 구천리로, 지수면 승내리를 승산리로 각각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신웅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 필자 소개

강 신 웅

前 경상대학교 인문대 교수

現 진주대첩광장 조성위원장

現 경남진주신문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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