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기오
교육학 박사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우리나라 교육의 형성과정은 고구려의 태학(太學)과 경당(扃堂)에서부터 백제의 박사(博士) 제도, 신라의 화랑도(花郞道)와 국학, 고려의 국자감 - 향교(鄕校) - 동서학당(東西學堂) - 오부 학당(五部學堂) - 서당(書堂), 조선시대의 성균관(成均館) - 4학(四學) - 향교(鄕校) - 서원(書院) - 정사(精舍) - 서당(書堂) - 특수교육기관(잡과 교육) - 실학((實學))교육, 그리고 구한말의 近代 學制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고구려의 교육은 태학(太學)과 경당(扃堂)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 국가의 체제를 갖춘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한문과 유학을 장려하고 숭배했다. 고구려의 학교교육은 지식과 사상의 전달 수단인 문자를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문자사용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국초 시용 문자(國初始用文字)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태학은 귀족 자제의 교육기관이며, 고급 관리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으로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태학 교육의 주요 내용은 5경 3사(五經三史)였다. 5경은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春秋)이고, 3사는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이다. 그리고 역서(歷書), 의서(醫書), 산서(算書), 악서(樂書), 병서(兵書) 등도 읽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태학의 총책임자는 조의두(早衣頭), 가르치는 사람은 박사(博士), 배우는 학생들은 장래에 관(官)에 나아갈 사람인 조의선인(早衣仙人)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의 경당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되어 있다. 태학이 고구려의 관학인데 비하면 사학은 경당(扃堂)이다. 경당은 서민들의 교육장(場)인 동시에 군사적으로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장소였다.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 등과 같은 주변 강대국들의 침입을 극복하고 강대한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태학과 경당 같은 교육기관의 힘이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백제가 망할 때까지 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일본 측의 기록(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 사람인 왕인(王仁)이 일본에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한 때가 서기 285년이다. 이는 박사(博士) 고흥이 활동하기 90년 전의 일이다. 이와 같은 일본의 한문학 서적 전수는 일본에게 유교의 도덕 이념을 가르쳐준 것이며, 일본 국민에게 조직적인 교육이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준 것이다.

또한 백제는 농업기술과 직조(織造) 기술, 그리고 의약, 천문, 지리, 음악, 미술, 공예 등을 일본에 전수하였고, 25대 무령왕 7년에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段楊爾)를 일본에 보냈으며, 3년 후에는 한고 안무(漢高安茂)와 교대도 하였다. 백제의 제26대 성왕 때에는 오경(五經) 박사, 의(醫) 박사, 역(曆) 박사 등 각종 전문 박사들을 일본에 보냈다. 백제의 중앙 관제는 내법좌평(內法佐平)이 의례(儀禮)를 관장하였고, 교육과 풍화를 관장하는 기관은 중앙 관제에 별도로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구려와 백제의 교육은 신라의 화랑도(花郞道) 교육과 국학(國學), 그리고 고려의 국자감(國子監) – 향교(鄕校) - 동서학당(東西學堂) - 오부 학당(五部學堂) - 서당(書堂) 교육의 등장에 직·간접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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