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향만리 8
김기원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

전북 부안군 변산에 12나한상이 유명한 개암사란 절 뒷산이 능가 산이다. 그곳에서 30분가량 오르면 정상부에 거대한 쌍 바위를 ‘울금바위’라 한다.

이 바위 아래쪽에 40여 명이 머물 수 있는 굴을 복신굴, 이곳은 백제 왕자 복신 이끄는 부흥군이 머물렀던 곳이고 옆의 베틀 굴은 당시 부흥 군이 옷감을 짜다는 곳 이외 이름 없는 작은 굴에 대한 일화와 더불어 복신이 이끄는 백제 부흥 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하였던 주류산성이 있는 지역이다,

바위 봉우리 오른쪽 아래쪽에 사람이 2~3명이 거주할 수 있는 작은 굴방을 신라 고승 원효대사와 사포가 이곳에 와서 백제 유민들의 아픔을 달랬다고 전하며, 원효대사가 머무르던 바위굴을 원효방(元曉房)이라 전한다. 원효 방은 협소하고 험난한 경사로 사람들 접근에 벼랑 바위 틈 길에 사다리를 올라야 했다.

이곳 바위 틈 사이로 수천 여 년간 세어나는 물 한 방울이 모여 작은 샘 주변에서 차를 끓어 마셨다고 찻터, 샘을 다천(茶泉, 乳泉)으로 이 샘과 원효 방 설화가 『동국이상국집, 권 제9.고율 시제 東國李相國集, 卷 第九.古律 詩題』에 전해 음으로 차의 유적지로 으뜸으로 전하여 찾는 객이 많은 편이다.

벼랑을 타고 원효 방에 들어서면 시원하게 펼쳐진 전망 풍경이 새롭다. 셋 평 남짓한 굴신과 한 평 남짓한 굴실이 나란히 있다. 큰 굴실에는 불상(佛像)이 놓여있던 자리가 있고, 바짝 말라있는 굴실 안 한쪽 구석 바위틈에서 서며 나온 물이 겨우 몇 한 방울이 고여 있는데 이곳을 다천(茶泉) 혹은 유천(乳泉)으로 불렸던 샘의 흔적이라 하겠다.

원효대사가 여기에 계실 때, 사포가 차를 달여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아 늘 차를 달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원효대사 가 부안에 온 것은 삼국 통일 이후였다. 오랜 전쟁으로 민초들이 원한과 상처로 고통 받았던 곳이다. 백제 무왕의 왕사였던 묘련스님이 창건하였다는 개암사 위에 묘련의 제자 복신이 숨어 백제부흥을 꾀했던 동굴에 원효가 왔다는데 큰 의미이고 원효의 화쟁정신(和靜精神)을 퍼였다는 것이다.

원효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여기에 머물면서 도를 닦고, 이따금 저 김제평야로 나아가서 불법을 강의(野壇法席) 하였는데, 그 때 수백 여 명의 군중이 이곳에 모여 들었다고 한다. 원효는 야단법석에서 민초들과 함께 춤추며 원한과 갈등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상생의 노래를 불렀다.

사포도 이 토굴에 같이 머물렀는데, 원효에게 차를 끓어주려고 해도 물이 없어 안타까워하니, 그 때부터 바위틈에서 물이 나오게 되었다. 그 물 맛이 매우 달아, 다천(茶泉)혹은 유천이 있는 곳으로 차의 유적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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