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기오
교육학 박사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신라의 교육은 통일 이전의 교육과 통일 이후의 교육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통일 이전의 교육은 신라 고유의 화랑도(花郞道) 교육이며, 통일 이후의 교육은 당(唐)의 교육 제도에 영향을 받은 국학(國學) 교육이다. 기타 신라의 교육에 관련된 것으로는 당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과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통해 관리를 선발한 제도를 들 수 있다.

화랑도(花郞徒)는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고유한 신앙 밑에 민족의 교양을 지도한 연원에서 생겼다고 볼 수 있다. 화랑도는 종교적·도덕적 교육을 목적으로 하며, 유(儒)·불(佛)·도(道)의 3교를 가지고 화랑의 도의를 닦는 덕목으로 원광법사가 세속 5계를 만들었다. 세속 5계는 화랑도들에게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의 덕목을 키워나가게 한 것이다. 화랑은 원화(源花)·국선(國仙)·선랑(仙郞)·풍월도(風月徒)·풍류도(風流徒)라는 많은 이름을 가졌는데, 이것이 조직화·형식화된 것은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부터이다.

화랑 집단은 국가의 지도를 받았으나, 국가의 직할 기관은 아니었다. 사적(私的) 단체였기 때문에 다수의 화랑단(花郞團)이 존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이며 민주적 조직이라 하겠다. 그러나 화랑도가 시작된 동기는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제도 혹은 인재를 선택하기 위한 고시제도로서 출발했다.

화랑 집단의 조직은 총지휘자로 국선을 두었다. 그리고 덕망과 용의(容儀)를 중심으로 14~15세 내지 17~18세의 청소년을 화랑으로 추대하되, 그 밑에는 낭도(郎徒)라는 명칭으로 수백 혹은 수천 명의 소년 단원들이 결속하였다. 즉 국선 화랑(國仙花郞)―화랑(선량)―문호(門戶)―낭도의 위계를 가졌다. 국선 화랑은 일종의 모범이고, 사범이다. 화랑은 귀족사회에서 선출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화랑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도중(徒衆)은 계급을 불문했다. 때문에 화랑도는 신라의 귀족 사회와 평민 사회와의 교량적 관계를 가진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랑도 교육은 신라 국가를 다스릴 중심인물을 양성하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군인, 무사가 될 수도 있는 국방 인재를 육성하는데 교육의 목적이 있었다. 화랑도의 교육과정은 지적인 면보다 활동적인 것을 가르쳤다. 주로 도덕적·정서적·신체적·사회적·군사적 훈련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무술(武術), 둘째는 이성도야(理性陶冶), 셋째는 정서 도야(情緖陶冶), 넷째는 심신단련(心身鍛鍊)과 직관 도야(直觀陶冶)였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완수한 제30대 문무왕 때부터는 중국의 문물(文物)을 수입하여 문화를 더욱 발전시켰다. 제31대 신문왕 2년에는 국학(國學)을 세워 예부(禮部)에 속하게 하였다. 신라의 국학 제도는 신문왕 2년 이후 점점 발달하여 제33대 성덕왕 16년에 공자(孔子)와 십철(十哲), 그리고 칠십이 제자(七十二 弟子)의 화상을 당으로부터 수입하여 석전(夕奠)의 예를 행함으로써 국학의 권위를 높였다. 제35대 경덕왕 때에는 국학의 명칭을 태학감(太學監)으로 잠시 고쳤다가 혜공왕 때에는 국학이라고 다시 불렀다. 신라 국학의 입학 연령은 15세~30세까지였으며, 입학자의 신분은 대사(大舍)로부터 무위자(無位者)까지였다. 국학의 재학 기간은 9년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학문을 할 수 없는 자는 퇴학을 명하였다. 국학 교육 목적의 하나는 유교의 사상을 연구 보급하는 유학의 전당 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유학의 이념에 입각하여 국가 관리를 양성하는 기능이었다. 국학의 교육과정에는 유학과(儒學科)와 기술과(技術科)가 있었다. 학제와 교재는 당의 것을 참작하였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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