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대첩

1578년 봄 황석산성아래 교북리에 위치한 안음향교에서 거창좌수 유명개(劉明蓋)에 대한 청문회(聽聞會)가 열렸다. 안음향교의 박승신(朴承信), 임진민(林眞愍), 정창필(鄭昌弼) 등의 선비들이 “공(公)은 반상(班常)이 유별한데 조석으로 여염은 물론 노비와도 어울려 담론하면서 같이 농사일을 하는 것은 경서(經書)의 도에 역행하고 기강(紀綱)을 해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있으니 사대부(士大夫)로서 징계를 받음이 마땅하다.” 라고 하여 청문회가 열렸다.

이에 유명개는 선비들에게 이르기를 「사대부인 위정자(爲政者)는 백성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백성(百姓)을 최상(最上)으로 삼고 백성은 식(食)을 최상으로 삼는다. 조정과 민심이 이반되고 민력(民力)이 떨어지면 민산(民産)이 불지 않는다. 진(秦)나라 수(隨)나라같이 사대부가 총명하여 법과 기강이 서고 군대가 강성할 지라도 백성이 항심(恒心)을 잃으면 뿌리 뽑힌 나무와 같아서 비록 가지와 잎이 무성할 지라도 곧 말라 버린다.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기로우니 어찌 서로 분별하고 말로서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성현께서 가로되 「법(法)으로 이끌고 형벌(刑罰)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빠져 나가되 염치(廉恥)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백성과 더불어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서 다지면 염치를 느끼고 또한 착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또한 공은 「선비가 경서를 비롯한 학문을 배운 다음에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관리가 되어 백성과 더불어 그 실상을 바로 알지 못하면 부세와 력역(力役)을 고르게 하지 못하고 송사(訟事)와 형벌(刑罰)을 줄이지 못하고 뇌물(賂物)을 막지 못하여 백성의 산업은 영구히 안정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역설하였다. 청문회 이후 양반들이 유명개의 주장과 행동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유명개의 백성에 대한 사랑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넘어 1577년 29살에 현의 어른이요 고문격인 거창 좌수(座首)로 위촉된 후 현감들에게 백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지금으로부터 440여 년 전, 1578년에 거창에 9개, 안음에 7개의 교육기관인 공회당을 설치하고 사비로 운영비를 조달하며 전 지역을 순회를 하며 백성의 도(道)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고 그러한 교육은 1597년 8월18일 황석산성에서 전사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유명개는 이렇게 종들과도 같은 밥을 같은 자리에서 먹고 일도 같이하면서 반상의 차별을 두지 않는 만인평등의 사상을 가장 낮은 곳에서 몸으로 가르치는 백성교육을 황석산성에서 순국하는 순간까지 20여 년간을 실시한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위대한 교육(敎育)자이며 만인평등의 사상가(思想家)였으며 군무에도 빈틈이 없는 전략전술(戰略戰術)가였다. 유명개는 만석군이요 황석산성 전투의 군사업무를 관장하는 군무장으로써 전투에 필요한 군량미를 비롯하여 소모되는 일체의 장비를 담당하여 사비를 들여서 충당하고 3개현을 순회하며 놋그릇이나 농기구 등 쇠붙이들을 공출을 받아서 위천면황산리 원학동 위천 강변대장간에서 창과 칼 활등을 직접 생산하고 조립하여 전투장비를 충당하였다.

양빈과 상놈으로 반상의 구별이 뚜렷한 태생적신분사회인 당시에, 인간을 인간으로써 차별 없이 대하고 20여 년간이나 백성(百姓)의 도(道)를 강론하는 유명개는 일반인들에게는 신(神)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만인평등에 대한 기대감과 새로운 사상에 대한 희망이 길고도 지루한 5일간을 치른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다. 위천강을 사이에 두고 동계정온의 가문과 중첩 혼사로 가장 가까웠던 유명개의 가문은 1728년 3월 동계정온의 4대손 정희량 사건에 연루되어 정희량의 집안과 함께 풍비박산이 되어 전 세계를 떠도는 유태인 같은 전국을 떠도는 거창유씨 Diaspora가 되어 흩어졌다.

황석산성을 공격한 7만5천3백 일본의 지상군이 70% 이상이 상실되어 그들의 임무인 조명연합군을 차단을 할 수가 없어 남원성을 공격하여 승리한 좌군이 북진을 하는 바람에 고니시가 주둔하던 순천을 제외한 전라남도는 북진하는 8월28일부터 9월19일까지 20여 일간 군사적으로 빈 공간이 되어 이순신장군이 고문의 여독이 남아있는 아픈 몸을 이끌고 하루에도 300리길이나 이동을 하면서 인적 물적 자원을 보충하여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명량전투를 준비하는 시간을 벌고 공간을 제공하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주성 입성 후부터 지상군의 총대장이 된 우기다 히데이에가 9월16일에 있었던 이순신의 명량전투 소식을 전남 보성에 도착하는 9월19일에야 들었다. 우기다 히데이에이는 이순신의 명량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에는 전북김제에서 패퇴한 나베시마나오시게부대를 위로하고 전북익산용안현에서 했던 1차재편성을 취소하고 전라북도는 위험하다고 하여 정읍애서 전라남도로 부대를 재배치하는 2차 재편성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나베시마나오시게부대가 금구에서 험준한 산악에서 9.15일 조선의병 원신(元愼)과 김언공(金彦恭)의 공격을 받아 패퇴하여 정읍까지 밀려오자 9.13일의 익산용안의 재편성을 무효화하고 9.16일 전라남도로 부대를 재배치하였다.

황석산성 대첩은 임진전쟁 7년 중 가장 많은 일본의 지상군이 궤멸된 전투로 일본인들이 끝까지 숨기고 싶은 전투다. 5일 전쟁에서 우군 7만5천 3백명 중 2만7천명만이 전투가 가능하고 48,300명이 전사 또는 부상자로 전투력을 완벽하게 상실한 전투로 일본인들이 기록한 내용이다.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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