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태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140여 년 만의 ‘통신사’

통신사는 대등한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를 상징한다. 조선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군將軍에게 통신사를 파견한 바 있었다. 그러나 1443년 이래 통신사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의 오랜 센고쿠시대戰國時代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종결되었다.

1587년, 히데요시는 규슈九州 지역 제패를 눈앞에 두었다. 규슈 지역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시마즈島津 가문은 그에게 결국 굴복하였다. 이제 일본에서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세력은 오다와라小田原 의 호조北条 가문 정도였다. 한편 규슈에 진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의 영주인 소宗 가문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았다. 히데요시는 쓰시마가 주선하여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일본에 와서 자신에게 항복의 예를 바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새 국왕 즉위 축하’와 ‘조선의 항복’ 사이

조선 국왕과 막부 쇼군의 관계는 단절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다시 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것은 대등한 형식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국왕이 와서 항복하라니, 조선이 이 요구를 들어줄 리는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쓰시마는 그의 요구를 그대로 전하지 않고, 일본에 새로운 왕이 즉위했으니 축하 사절을 보내달라는 말로 바꾸어 조선을 설득하고자 했다.

조선은 일본의 갑작스러운 통신사 요청에 당황했다. 게다가 접촉해온 이는 이전에 관계를 맺었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도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조선은 우선 이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쓰시마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2년 후인 1589년, 이번에는 쓰시마의 영주인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직접 조선에 건너와 교섭에 임했고, 이전에 조선의 해안을 약탈하였던 조선인 해적 두목과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송환한다는 조건으로 통신사 파견에 동의해주었다. 통신사를 이끄는 세 사신에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이 선발되었다. 통신사는 1590년 3월, 한양을 출발하였다.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에게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알려진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양국관계의 변화 속에서 통신사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1429년 첫 번째 통신사로부터 590주 년이 되는 2019년을 앞두고, <조선통신사 이야기> 코너를 통해 조선왕조 대일 외교의 역사이자 문화 사절이었던 조선통신사를 들여다 본다.

히데요시를 만난 조선 사신

1590년 7월 일본의 수도인 교토에 도착한 통신사는 몇 달 동안이나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남아 있던 저항 세력인 호조 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오다와라에 가 있던 상황이었다. 히데요시는 호조 가문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후에야 교토로 돌아왔다. 통신사는 11월이 되어 겨우 국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통신사는 이 자리에서 히데요시를 직접 만났다. 이 통신사는 조선인 중에서 히데요시를 직접 목격한 유일한 사절이었다. 통신사는 이때의 감상을 남겼는데, 먼저 히데요시의 용모는 왜소하고 추하며 얼굴빛이 검고 피부가 주름져 마치 원숭이 같았으나, 눈동자가 번쩍이며 사람을 쏘아보았다고 한다. 접견례는 통신사에게 매우 생소하였다. 연회 음식은 단출하여 떡 한 접시와 옹기 사발에 담은 탁주가 전부였다. 술을 나누며 서로 인사를 나누는 의례도 없었다. 히데요시는 접견 자리에 자신의 아기를 안고 나와 조선 악공들의 연주를 감상하였는데, 아기가 옷에 오줌을 누자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시녀에게 아기를 넘겼다고 한다. 통신사는 자신들이 알고 있던 외교 의례를 무시하는 듯한 이러한 행동을 ‘방약무인傍若無人’이라는 글자로 표현했다.

사행단의 보고와 전쟁의 위협

조선 국왕이 ‘일본 국왕’에게 보낸 국서를 전달한 후, 통신사는 귀환 길에 올랐다. 조선 국왕의 국서에 대한 ‘일본 국왕’의 답서는 통신사가 교토를 떠날 때까지도 전달되지 않았다. 통신사는 며칠 후 오사카에서 국서를 전달받았는데, 그 내용은 매우 놀라웠다. ‘조선 국왕 전하殿下’라고 해야 하는 것을 낮추어 ‘합하閤下(혹은 각하閣下)’라고 하고, ‘예폐禮幣’라고 해야 하는 부분을 조공품이라는 의미를 담은 ‘방물方物’이라고 하는 등, 조선을 한 단계 아래로 보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조선의 투항을 기정사실로 하고, 앞으로 명나라를 침략하고자 하니 조선이 합류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통신사를 ‘조선의 항복’으로 제멋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통신사는 수정을 요구했고 긴 논의 끝에 비교적 온건한 내용의 수정된 국서를 받아 귀국하였다. 그러나 통신사는 원래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1591년 2월 부산에 도착한 통신사는 즉시 한양으로 가서 보고를 올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황은 명백했다. 정사 황윤길을 비롯한 통신사 일행은 대부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흥분했으나, 김성일만은 그에 반대하면서 ‘히데요시의 눈은 쥐와 같아 두려워할 만한 이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후일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전쟁 위기론에 반대한 이유를 묻자 그는 ‘나 역시 어찌 왜적이 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다만 모두가 놀라고 현혹될까 우려되어 이를 풀어주려 하였던 것일 뿐이오’라고 답했다. 김성일은 교토에서 쓴 시에서, 화려한 저택이 늘어서고 백성들의 집도 가득하며 물자도 풍부하나, 전쟁을 그치지 않으니 전쟁이란 불과 같아서 그치지 않으면 자신도 타고 말 것이라며 경계한 바가 있었다. 조선이 ‘좋은 뉴스’인 김성일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안심하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은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명나라에 일본의 상황을 보고하기도 했다.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관건은 언제 어디서 침략이 시작되느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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