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

황석산성에서 8월16일 일본지상군이 궤멸되고 9월16일 명량전투로 보급로가 끊어진 일본군은 전라도에서 철수하여 경상도 바닷가 왜성으로 돌아감으로서 4도 분할이라는 정유전쟁의 목표를 상실하였고 풍신수길에게는 소득 없는 7년간의 전쟁을 포기케 하였으며 전쟁의 참패로 지친 풍신수길은 1597년10월부터 헛소리 하다가 고황(膏肓)병이 들어 1598년 7월17일에 죽고 일본군이 철수를 함으로서 풍전등화였던 조선이 다시 살아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결과 명나라는 망하고 일본은 풍신수길의 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가 집권하는 등 정치에 큰 변화와 영향을 미쳤으나 전쟁 당사국인 조선만이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백성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또다시 태생적양반사회로 돌아감으로서 유명개의 만인평등사상은 물거품이 되었고 300여 년 만에 제국주의로 다시 침략한 일본군은 1597년 황석산성에서 궤멸된 것에 대한 역사적 복수로 1914년 3월1일 안의군을 파군하여 안의면으로 강등을 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석산성을 공격한 코베기 대장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의 영지 히로시마(廣島)가 핵무기 폭격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는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100여 년 전 1914년 3월1일 파군되어 강등당한 안의군은 아직도 조선총독부의 행정명령 그대로 안의면으로 남아 분노(憤怒)의 도시가 되어 대한민국 역사학자들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의심하며 그 억울함이 목구멍에 걸려 있다.

- 조선총독부의 황석산성 대첩 흔적지우기

황석산성 대첩 300년 만인 1910년대에 다시 돌아온 일본인들은

-황석산성 순국선열을 대한 제례행사를 못하게 하였고

-황석산성에서 전사한 순국선열들을 모시는 새서원의 황암사를 불태웠고

-안음현청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안의초등학교를 세워 현청의 흔적을 지웠고

-일본국사대사전에 가짜대장 모리히데모도를 삽입하여 조선과 일본의 후손들을 속이고

-황석산의 정기를 말살하려고 1815년 이래 군이었던 안의군을 1914.3.1.일

마리 위천 북상면은 거창군으로 서상 서하 안의면은 함양군으로 나누어 파군하는 등,

황석산성에 대한 역사적인 복수로 5일전쟁의 진실을 왜곡하고 지움으로써 황석산성 대첩은 한국과 일본의 후손들에게는 잃어버린 역사가 되었다. 황석산성전투에서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모도지가 두 장군이 부상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8월부터 다음해 철수하는 3월까지 8개월간이나 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일본 총독부는 임진전란사에서 황석산성 참전일본군을 7만5천3백명이 아닌 2만7천명으로 축소하고 전투기간도 16일 하룻밤 전투로 왜곡하면서 증간목표인 황석산성 직전인 거창에서 우군은 합천에서 거창으로 진출하여 전열을 정비한 후 주력은 안의를 거쳐 일부병력으로 함양과 운봉을 거쳐 남원으로 향하게 하고 가도오가 육십령을 올라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황석산성을 공격했다. 라고 왜곡했다.

-부상당한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우군대장을 지우고 양자인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를 가짜대장으로 만들어 천안으로 올라갔다라고 일본국사대사전을 조작하고

-뒤따라가던 가도오기요마사가 육십령고개를 올라가다가 황석산성에 안음거창함양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듣고 되돌아 와서 공격을 하였다라고 하였고

-100% 궤멸된 조오소가베모도지가(長曾我部元親)는 거론도 하지 않았고

정유재란에 첨전한 일본군의 우군대장으로 각종자료에 安藝中納言(毛利輝元)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毛利輝元는 임진왜란 개전기에 병으로 귀환하고 이때부터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가 모리군을 지휘하였다. 정유재란기에도 일본에서의 군사편성은 安藝中納言(毛利輝元)3,000명이 8번에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휘를 양자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에게 맡기고 자신은 유군적 존재였다. 당시 그는 조선으로 건너가려고 이키(日吱)에서 머물 때 풍신수길의 朱印狀을 받고서 조선에 있는 가신들에게 감사장으로 보내고 귀환하였다. 라고 알려져 있다.라고 왜곡했다.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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