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자연지명

비봉산

조선 초기에 진주에는 인물이 많이 나왔다. '진양지'의 월아산조에 이르기를 "산 동쪽에는 비봉의 형국이 있어 예로부터 정승이 나고, 산 서쪽에는 천마의 형국이 있어 장수가 날 것"이라고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시켜 진주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다. 무학대사가 내려와 진주성에서 대봉산(大鳳山) 쪽을 바라보니 천하의 명당 자리였다. 대봉산은 “큰 봉황새가 사는 뫼”란 뜻인데, 무학대사는 이 산이 있기 때문에 진주에서 인물이 많이 난다고 판단하였다. 산의 기운이 대룡골과 황새등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에 대사는 대룡골과 황새등을 잇는 지맥을 끊고, 산의 이름도 비봉산(飛鳳山)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봉황새가 날아가 버려 정기가 빠진 산”이란 뜻으로 그렇게 고쳤던 것이다.

봉알자리

진주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고 대봉산(비봉산) 밑에 웅거하여 권세를 부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대봉산(비봉산) 위에 봉암(鳳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일컬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봉암을 깨어 없애고 봉은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하였다. 후에 진주 사람들이 날아간 봉을 다시 부르려면 알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비봉산을 마주보는 상봉동 평지에 흙으로 산과 같이 쌓아올려 그 복판을 파서 마치 새들의 알자리 같이 "봉알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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