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용수
한국문인협회, 신서정문학회
국보문인협회 부이사장
남강문학협회 감사

 

태완이

1.태완이

아직 정신이 몽롱하였다.

어제 초저녁부터 병식이의 군입대 환송연을 한답시고 새벽까지 질이 나쁘지만 돗수가 높은 막소주와 막걸리를 섞어 마셨고, 술에 취한 채 어떻게 왔는지 조차 모르게 집으로 돌아와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아버지의 벼락같은 고함소리에 잠이 벌떡 깼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고 있으면 우짜노”

집에 나무가 없는데 나무하러 가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호통 소리를 듣고 황급히 일어나서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후다닥 지게를 챙겨 메고 대문을 나서려다 말고 수돗간에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한참 동안 냉수를 들이 킨 후 잽싸게 대문을 빠져 나와 산길로 이어지는 골목어귀를 돌아가면서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욕설을 내 뱉는다.

“씨부럴”하는 욕설 속에는 오늘 같은 날에는 한번쯤 그냥 지나쳐 주지 않고 틀림없는 그날에 틀림없는 그 일을 해야만 하는 기계 같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들어 있고, 스무 살이 넘어 이제 청년이 되었음에도 아버지의 고함 소리 한번에 끽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고양이 앞에 생쥐가 되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도 들어 있고 언제까지나 머슴살이를 해야 하는, 도무지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한 자신에 대한 탄식, 의기양양을 넘어 자랑스럽게 군대에 가는 병식이에 대한 부러움도 들어 있다.

집에서 도망치듯 뛰쳐 나온 바람에 앞뒤를 가릴 틈도 없었지만 지난 겨울 갑자기 돌아 가신 약초할아버지 집 허물어져 가는 돌담장을 돌아 산길로 접어 들면서 아직은 짙은 구름이 더 많아 암울 하기만 한 하늘은 태완이의 어지러운 가슴을 그대로 나타내는 듯하지만 그런 것들을 쳐다 볼 기운도 없이 발아래 길만 쳐다보며 걸음을 재촉하는 태완이의 눈에도 누가 일부러 심어 놓았는지 아니면 어쩌다가 뿌리가 떨어져 밭이 되어 버렸는지는 모르지만 제법 통통하게 살 오른 돌나물이 소담스레 무리지어 피어 있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민들레도 제법 키가 올랐다.

발길이 산 어귀에 닿고 이제는 아버지의 잔소리 사정권에서 벗어 났다는 안도감이 밀려 와서인지 갑자기 속이 뒤틀리고 쓰려온다.

밤새 싸구려 술을 짬뽕해서 퍼마셔 황폐해진 위 속으로 또다시 얼음장같이 차가운 냉수가 들어 갔으니 천하에 없는 장사도 버티어 낼 재간이 없다. 창자가 뒤꼬이는지 주리를 틀듯이 아파오고 온 몸이 떨려온다. 창자가 뒤틀리자 태완이는 자기도 모르게 뱃가죽을 잡고 몸을 앞으로 숙이다가 등에 메고 있던 지게가 머리 위로 부터 벗어져 떨어지려고 하자 잽싸게 허리를 곧추 세우면서 지게의 균형을 잡는다. 

극심한 봄 가뭄이라고 온 나라가 목말라 하던 4월의 마른 대지 위에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려 가뭄에 애타던 농부들 보다 먼저 앙증맞은 풀들이 맑은 물을 양껏 마시고 몸집을 불려 가고 있고 새 잎이 돋아나는 나무들도 연초록의 맑은 색깔에서 녹음 짙은 여름으로 변해 간다.

아침, 저녁으로는 아직 날씨가 쌀쌀하지만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려니 우중충한 구름에 가리워져 있던 햇살이 이제는 여름 볕이 되어 제법 땀을 흘리게 한다.

쌀 한 가마니를 지고 산길을 비호같이 내달리던 태완이가 빈 지게를 메고도 이 정도의 산길에서 헉헉대는 것은 날씨 탓이라기보다 어젯밤에 과도하게 술을 마신 때문이다.

엷은 구름도 걷어지고 나무그늘이 없었다면 온통 햇빛을 받으면서 산을 갔을 것이다.

병식이는 아마도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입영열차를 탔을 것이고, 신자도 역까지 따라가서 입영열차를 타는 병식이를 배웅해 준 후 서울 가는 기차를 탔을 것이다.

생각이 신자와 병식이에게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에이 씨부럴...!” 또 욕을 하면서 들고 있던 지게 작대기로 길가에 있는 멧돼지 처럼 생긴 바위의 대가리 부분을 냅다 후려 갈긴다.

언제 부터인가 사람들은 이 바위를 ‘멧바구’라고 하였는데 멧바구는 이정표가 되거나 산길을 오갈 때 이 멧바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땀을 식히기도 하고 나물을 캐던 아낙들이 오가는 길에 남편과 시어미 욕을 하고 가족 자랑을 하는 수다 터가 되어 있었다.

태완이는 아직까지 한번도 멧바구에 앉아 쉬거나 심지어 기대어 본적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멧바구에 앉아 쉴 때도 태완이는 멧바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먼 산을 바라보거나 딴전을 팔 뿐이고 멧바구 옆을 지날 때는 지게작대기로 멧바구의 불룩 튀어 나와 마치 멧돼지 주둥이 같이 생긴 부분을 냅다 휘 갈기고 지나 가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태완이는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렸을 때 부터 계속해 온 이 행동을 멈추거나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에이 씨부럴...!”

태완이는 자신에게 하는 욕인지, 신자에게 하는 욕인지, 신자를 빼앗아 간 병식이에게 하는 욕인지 구분이 되지 않지만 하여튼 큰소리로 욕이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아 욕지거리를 하면서 지게작대기로 멧돼지 주둥이 부분을 냅다 갈긴 것이다.

지게작대기로 멧바구를 너무 세게 후렸는지 작대기를 통해 온 진동이 손을 지나 팔뚝까지 전달되어 손을 물론이고 팔뚝까지 얼얼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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