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
황석산성(백성의 전쟁 황석산성대첩)

이것은 모리데루모도가 사라진 이유, 전주성에서 우기다히데이에 좌군이 북진한 이유,
전북산용안과 정읍회의에서 재편성한 이유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지극히 일상적인
군사상식을 생각지도 않고 황석산성 전투를 지우려는 일본인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는 유군(遊軍)적 존재였다라고 한 것은 부상을 당하여 지휘는
할 수 없지만, 아직도 전투현장에는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군이란 군사적으로는
게릴라나 빨찌산 유격대 등으로 표현을 하는데 우군대장이 궤멸되어 패잔병을 이끌고
유격활동을 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국사대사전의 기동로는 모리데루모도의 우군 7만5천3백 명이 황석산성에서 궤멸된 것이 아니라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 대장은 황석산성에서 오지 않았다고 하고 그의 사촌이요, 양자요, 예하부대장인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를 가짜대장으로 만들어 천안으로 올라갔다는 근거를 만드는 조작이다.

 

일본국사대사전상의 기동로
일본국사대서전이 1887년도에 창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 기동로는 1910년대 조선사편수회사건이후에 삽입이 되었고. 1597년 그 당시에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는 궤멸된 모리데루모도 3만 명 중 기동이 가능한 2천명을 데리고  구로다 부대에 배속되어 미끼부대로 직산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

 

첫째, 중간목표인 황석산성 앞에서 적전분열을 하는 엉터리 전술을 구사하였다는 것은 군사상식상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것은 우군의 궤멸사실과 모리데루모도 대장을 감추고 가짜대장 모리히데모도를 등장시켜 일본의 후손들을 속이기 위하여 일본국사대전을 조작한 것이다.
둘째, 올라갔으면 내려가는 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으니 지금도 그대로로 있어야 하고 
셋째, 천안에 도착한 후 어떤 작전을 했는지 투입과 산출이 전혀 없어 거짓임이 뚜렷하다. 
넷째, 지도상에 등장한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는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의 사촌이고 양자(養
子)이며 부하다. 길천가 문서에 의하면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와 깃가와히로이에(吉川廣家)는 모리데루모도와 사촌이었으나 깃가와의 아버지 모리모도하루(毛利元春)가 깃가와 집안으로 양자를 갔고 깃가와히로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가의 협상대표로써 모리라는 가문의 이름만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1백20만5천석의 대영주가 30만5천석의 중소영주로 강등하는 협상으로 모리가문을 지켰다.
 1597년 그 당시 지도상의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는 90%가 궤멸된 모리데루모도의 3만 명 중 기동(起動)이 가능한 2천명만을 데리고 미끼부대로써 구로다의 5천 명 중의 일부로 직산전투에 참전하고 있었다.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를 포함한 구로다 부대 5천명은 가도오와 같이 경남양산까지 양동작전을 지속하면서 코베기 보고서 여러 개를 보고했는데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 이름으로 발급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구로다나가마사(黑田長政)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는 코베기보고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 한부대의 지휘관이 아니라 소단위 부장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 그는 우군(右軍)대장이 아닌 총독부가 조작한 가짜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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