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한영탁

서울대 신문대학원 졸
조선일보 기자, 세계일보 편집부국장
한양대 교수 역임
수필 등단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까지 전국 대다수 가정의 땔감은 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겨울이 오면 대도시나 소읍의 가정집들은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의 장작을 사들이기에 바빴다. 고등학생 때 부산의 작은아버지 댁에서 살던 나는 학교를 다녀오면 마당에 쌓아둔 통나무 장작을 패는 일부터 먼저 해야 했다. 고향 집이 있는 시골의 5일장 장터 어귀에 인근 산촌에서 온 나무꾼들이 장작이나 솔가리(갈비)가 실린 지게를 괴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집집이 나무를 땔감으로 쓰니, 식목일도 정하고, 아무리 많은 나무를 심는다지만, 산에 나무가 남아날 리가 없었다. 전쟁 직후는 도시의 땔감 장수들이 군부대 사람들과 짜고 먼 곳 높은 산의 나무들을 마구잡이로 벌채해 장작이나 숯을 구어 내다 파는 일이 횡행했다. 그런 일은 내가 군대 생활을 시작한 1950년대 말까지도, 군대의 후생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사회적 질서가 좀 잡히고 점차 경제가 나아지면서, 석탄의 증산으로 주로 연탄을 땔감으로 쓰다가, 나중엔 유류를 주 연료로 정책을 전환함으로써 산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가서야 비로소 산림보호와 조림운동이 손발을 맞추게 되어 우리 산림을 푸른 숲으로 탈바꿈 시키게 되었다.

나는 1978년 가을 미국을 여행 중, 그곳 임학자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산림녹화 정책 덕택에 한국의 육림 사업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산림녹화 성공 사례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놀랐다. 나로서는 전혀 뜻밖의 얘기였다. 그 뒤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 말이 세계 임학계의 정설(定說)임을 확인했다. 나는 미처 눈여겨보지 못한 사이에 우리 산들이 자랑스러운 푸른 산으로 바뀐 것을 새삼스럽게 돌아보며, 자신의 무신경과 무지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올바른 정책을 세우고 묵묵히 꾸준히 밀고나간 이들과 현장에서 땀 흘려 기적을 이룩해 준 산림녹화 일꾼들의 숨은 노고에 경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는 달리 반도의 북녘 땅에서, 이른바 다락 밭을 개간한다며 산을 모두 벌거벗겨 놓은 김일성 주체농법의 현실은 우리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벌거숭이산은 큰 비가 쏟아질 때마다 산사태를 불러와서 농경지를 자갈과 모래의 토사로 뒤덮고, 하천의 하상(河床)을 높여 홍수를 불러오고, 항구를 메꿔 큰 배가 드나들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다락 밭 만들기에는 농민은 말할 것 없고 도시의 근로자, 학생, 인민군 병사 등 다리와 허리를 쓸 수 있는 남녀노소 모두가 동원되어 하루 열두 시간씩 2교대로 일했습니다. 그 무렵 북한의 산은, 밤에는 횃불로 온 산이 불타고 있는 것 같았고, 낮에는 산등성이에 사람들이, 아니 개미떼가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 북한에 체재했던 어느 일본 농학자의 증언이다.

김일성이 즉흥적 교시 한마디로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지 4년 만에 북한의 산들은 죄다 벌거숭이 붉은 산 천지가 되어버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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