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숙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 쓰시마, 시모노세키下關, 도모노우라鞆浦, 우시마도牛窓, 오사카大坂,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 시즈오카靜岡를 거쳐 에도막부의 쇼군이 거하는 에도江戶에 이르는 왕복 약 8개월이 걸리는 긴 여행이었다.

흔히 통신사는 문화사절단이기도 했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한다. 조선인들이 사행록을 남겼듯이 조선의 문화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에게 사절단 일행과의 접촉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조선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통신사 일행의 구성원은 다양했다. 사절단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삼사三使를 비롯하여 통역을 맡은 역관譯官,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제술관製述官, 동의학東醫學에 정통한 의사, 글씨에 능한 사자관寫字官, 서기書記, 화원畵員, 승마술에 능한 마상재馬上才, 풍악수風樂手와 수부水夫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통신사가 머무는 각지의 숙사에는 일본의 학자, 문인, 상인들까지 면회를 원하며 모여들었고 상호 간에 시문詩文이 교환되었다. 통신사가 경유했던 지역에는 그들이 남긴 시와 기행문이 현재까지도 전래되고 있다.

이국 정취 가득한 퍼레이드였던 통신사 행렬

통신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당시 일본의 서민들에게는 매우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왜냐하면 에도시대의 일본은 막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하는 바람에 일반인의 해외 도항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중국의 선박과 네덜란드의 선박이 일본에 와서 무역을 하기는 했지만 오직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로 만 입항할 수 있었고, 입항해서도 중국인과 네덜란드인은 막부가 지정한 장소에서만 머물다가 떠나도록 되어 있었다.

에도시대 일본의 서민들에게 외국인을 볼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전무한 셈인데, 그런 상황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은 외국인을 직접 목격하고 ‘외국’을 의식할 수 있는 제한된 기회였다. 통신사는 교토 부근에서부터 에도까지 육로를 이용하여 이동했는데, 통신사 자체만으로도 약 500명의 인원에 쓰시마의 무사들이 앞뒤로 호위하며 함께 움직였으니 전체 인원은 500명을 훨씬 상회했다.

쓰시마의 무사들과 함께 조선의 풍악을 울리며 이동하는 통신사는 행렬의 선두에서 말미까지 구경하는 데 약 2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통신사가 정기 사절도 아니고 수십 년에 한 번 성사되는 것이다 보니 수백 명 규모의 통신사 행렬은 당시 일본 서민들이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비일상적인 이벤트’였다.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차림새를 한 통신사 일원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이국의 정취가 가득한 ‘2시간짜리 퍼레이드’이자 오락이었다. 자연히 일본인들은 통신사 일행의 외모와 행동에서 얻은 인상을 회화, 예능, 공예 등을 통해 표현했다.

대륙의 이국에 대한 인상, 도진 오도리로 남아

그중 대표적인 것이 무형의 예능인 춤, ‘도진 오도리당인 춤: 唐人踊り’이다.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는 조선통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진 오도리가 지역의 전통축제인 ‘마쓰리祭り’를 통해 아직도 행해지고 있다.

오카야마岡山 현 우시마도 초牛窓町에 전래되는 ‘가라코 오도리唐子踊り’는 두 명의 소년이 추는 춤인데, 통신사의 최고위 직인 세 사신三使의 종자로 시중들던 소년小童의 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통신사가 남긴 기록에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사행단원 중의 악사에게 연주를 시키고 소년들에게 맞춤을 추게 했다’라는 서술이 나온다. 조선 소년들이 추던 낯선 춤에서 받은 인상을 모티브로 해서 현지 서민들이 그것을 흉내 내기 시작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의 형식화된 춤사위가 되어 계승된 것이다. 우시마도 초의 가라코 오도리는 1960년 오카야마현의 ‘중요 무형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시모노세키下關 야스오카초安岡町 와키우라에서도 ‘도진 오도리唐人踊り’라는 기우제 춤이 메이지 시대까지 전해졌는데, 오카야마현 우시마도초의 ‘가라코 오도리’의 대무對舞와 거의 비슷한 형식이었던 듯하다. 그 외에도 많은 지역에서 도진 오도리가 행해졌다고 하나, 현재에는 미에현 스즈카시의 도진 오도리, 미에현 츠시의 도진 오도리가 남아 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문화적 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조선통신사로부터 유래했다는 이런 전통 예능이 ‘도진 오도리’라는 명칭으로 불린 이유는 무엇일까. ‘당인唐人’이라 하면 보통 중국의 ‘당나라 사람’이라는 의미를 떠올리지만, 16세기 이후 전근대 시기 일본에서 ‘당唐’은 중국과 조선 모두를 지칭했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외국에 대한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일반 대중의 감각으로 ‘당’은 막연하게 ‘대륙의 이국’을 의미했다. 각지의 도진 오도리나 가라코 오도리를 찍은 사진을 보면 춤꾼들이 조선의 복장을 정확히 재현했다고 보기 어려운 의상을 입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게다가 각지의 도진 오도리 춤꾼들이 입은 의상은 서로 유사성도 적다. 도진 오도리는 당시 일본의 서민들이 조선통신사를 통해 얻은 ‘인상’이 ‘기억’을 통해 변주되며 전승되다가 ‘전통’이 된 ‘이국풍의 예능’인 셈이다.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