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

 

1970년 최초 지정된 진주시의 대표공원인 진양호가 공원지정 후 50년이 되어가는 현재 공원시설의 노후와 신규 프로그램의 도입 부족 등으로 해마다 방문객 감소세를 보이고 있음에 따라 진주시의 대표공원으로서 위상회복은 물론 변화된 여가문화를 수용하는 진양호공원 활성화 및 관리운영방안 수립을 위한 새로운 진양호 개발인 “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진주시가 발표했다.

프로젝트의 기본방안을 보면 공원시설 확충과 매력적인 집객시설, 도시 랜드마크 도입으로 진주시의 핵심공원 및 서부경남의 거점관광시설로 공원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진주시의 새로운 진양호 개발 “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앞두고 진양호와 남강 바로알기 위하여 역사 속의 남강과 진양호의 역할을 소개하고자 한다.

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는 전편에 이어 이번호는 도시문화의 신재생 거점공원으로 재탄생하는 비전으로 시민여가지구와 진주의 문화 랜드마크, 레져 모험지구와 생태 숲 지구 조성으로 변화하는 진주의 대표 공원 만들기로 전개된다.

 

[조선시대 댐 제방과 사천만 방수로 논의]

『정조실록』정조 20년 5월 8일조에 보면, 장재곤이란 자가 “진주 너우니(광탄)에 제방을 만들고 방수로를 사천만으로 뚫으면 낙동강 하류 경상도 13개 읍이 홍수의 위험으로 벗어나 좋은 농지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으나, 거짓말로 드러났다는 기사가 있다. 구상은 기발하였으나, 당시의 기술로는 실현하기가 어려운 시대를 앞선 발상이었던 것이다.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간민(姦民) 장재곤(張載坤)이란 자가 용동궁(龍洞宮)에 고하기를“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에서 샘물이 솟아나와 긴 강을 만들고, 그 강이 곧장 진주로 흘러가 다시 김해에 이릅니다. 그런데 한번 장마가 지면 함안·창원·초계·영산·양산·현풍·김해·칠원·의령·창녕·밀양·진주·성주 등 13개 고을의 강에 인접한 토지가 모두 침수되어 한 포기도 수확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 강 상류에는 진주의 광탄(廣灘)과 지소두(紙所頭)라는 곳이 있는데, 양쪽 강안이 가파른 절벽이고 지세가 좁고 낮으며 중앙에 우묵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물길을 뚫어 강물의 방향을 돌려 사천의 바다로 흘러가게 한다면, 그 형세가 마치 병을 거꾸로 세워 쏟아 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곳은 바다와의 거리가 25리에 불과하고, 뚫고 소통시킬 곳도 한 마장(馬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길을 뚫은 뒤에 지소두 아래에 제방을 쌓아 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한다면 13개 읍의 허다하게 침수되던 곳이 장차 훌륭한 농지가 될 것입니다.”

이에 비변사가 본도에 공문을 하달하여 물으니, 경상도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장계하기를 “보좌관을 보내 특별히 사정을 탐색하고 고을 원을 엄하게 경계하여 착실히 살펴보게 한 결과, 지역의 형세와 백성들의 뜻이 건의한 자의 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지금 광탄에 제방을 축조한다 하더라도 낙동강의 하류는 그대로 있고, 지소두의 목에 물길을 뚫는다 하더라도 조곡의 지맥(地脈)이 점점 높아지게 되면, 예전의 포구는 침수지의 가감이 없어 새로이 튼 물길은 유리하게 유도하기 어렵게 됩니다. 더구나 두류산 남쪽에서 발원한 물이 멀리 광탄에까지 흘러오는 과정에 절벽과 산록이 서로 뒤엉키면서 물살이 매우 빨라지니, 지금에 장정들의 힘을 빌려 하류를 막고 우묵하게 들어간 곳으로 선회하는 물살을 유도한다 하더라도 한번 여름의 호우를 당하여 상류의 물이 급하게 불어나게 되면 그 형세가 틀림없이 제방이 터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이 제방을 쌓기 전보다 더 극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해읍의 성지가 강변의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범람하는 사태는 본래 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시 지소두에서 물길을 뚫을 만하다는 곳에 대하여 말하면, 그곳은 바다에서 30리 거리에 있으며 땅의 형세가 점점 높아져서 물길이 왕왕 막히고 있는데, 실로 13개 고을의 백성으로 그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13개 고을이 혜택을 입는다고 한 것은, 함안 등 9개 고을은 남강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니 혹 그럴 수 있겠다고 하겠으나, 성주 등 네 고을은 낙동강 상류에 있어 애당초 논의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장재곤의 성명은 호적에 실려 있지 않으며 행동이 거의 허황됩니다.”하니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수본(手本)을 보고서 일의 형세로 유추하건대 지극히 허황하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해궁(該宮)의 사체는 다른 궁방(宮房)과는 특별하다. 해도에 물어보지도 않고 지레 먼저 결정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뜻이 없는 것이다. 비록 글을 만들어 판하(判下)하였더라도 해도의 장계를 받아본 뒤에 조치하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조사하여 올린 장계를 보니 요량했던 것에 벗어나지 않는다. 근래에 이러한 간교한 일의 폐단에 대하여 얼마나 엄중히 경계했던가. 이른바‘고발하는 자에 대하여는 네 번 고발하면 한 차례 상을 내린다.’는 법을 시행하지 말게 했다면 감히 상언(上言)하거나 정소(呈訴)할 수 있었겠는가. 백성들의 습속이 가증스러우나 간사한 백성들을 어찌 다 논하겠는가. 당해 차지(次知) 중사(中使)는 내시부로 하여금 각별히 엄중 조사하게 하고 앞으로 다시 이런 허황된 일에 대한 수본(手本)을 올릴 경우에는 해당 중사에게 등급을 올려 엄중 처치하는 법을 시행하라. 이러한 뜻을 해도에 지시하여 즉시 13개 고을의 수령에게 통지하게 하라.”

 

[남강의 홍수와 진주 시내 침수]

남강 하류의 잦은 범람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남강 치수사업으로서 남강댐 건설이 요구되었다. 대평면 아래에서 경호강과 합류하는 남강은 그 유량이 평시에는 본류인 낙동강 전체의 27%이지만, 홍수 시에는 42%에 달하여 남강 유역이 낙동강 하류의 홍수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연강수량은 남강 유역이 1,300㎜, 낙동강 본류인 경상북도는 900~1,000㎜로 남강 유량 비중이 높다. 특히 낙동강 하류의 삼랑진에서 물금 구간 19㎞는 폭 500~800m의 협곡으로서 홍수 시 유통이 불량하여 수위가 급속히 상승함으로써 삼랑진 일대와 진주를 포함한 남강 유역의 홍수 피해가 극심하였다. 1910년대 진주지역의 2대 현안은 경남도청을 진주에 머물게 하는 도청 이전 방지와 남강 치수사업의 실시였다고 한다.

[1936년의 남강 홍수 참상]

1940년에 발행된 『진주대관』에 의하면, 근세에 와서 남강 범람에 대한 기록적인 것은 1920년, 1925년, 1933년의 대홍수였으며, 그 중에서도 1936년 8월의 것이 가장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이 해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쏟아진 집중호우와 강한 태풍으로 인하여 27일 밤은 진주읍내 전 시가지가 침수되는 공포의 밤이 되었으며, 또한 미증유의 태풍 피해를 입음으로써 3만5천의 진주읍민은 복구의 희망조차 가지기 어려울 정도의 참화를 입었다. 이때 남강의 수위는 최고 9.5미터에 이르러 장대동 제방이 터지고,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해서 시내는 순식간에 침수되었으며, 5천5백호의 가옥이 침수되어 진주읍내는 죽음의 거리로 변하였다.

27일부터 28일에 걸쳐 진주읍내에서 침수되어 피해가 컸던 지역은 칠암동·본성동·남성동·동성동·장대동 등이었으며, 망경동·강남동만은 겨우 수난을 면했다. 강우와 태풍이 그치자, 8월 28일부터 군·읍·경찰·소방·재향군인회 등 모든 기관이 총동원되어 복구사업에 들어갔다. 이재민에게 밥을 지어주고 수도를 무료로 개방했으며 우물 소독도 실시하였다. 또한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하고 전염병 예방처치와 방역업무도 하였다.

한편, 28일 이른 아침, 시내 나루를 이용해 순시하면서 참상을 목격한 당시 진주군수는 참상을 도에 보고하였고, 보고를 접수한 도에서는 피해상황과 구제대책을 종합, 수립하여 총독부에까지 보고하였다. 총독부 정무총감은 경남지사의 안내로 9월 3일 피해상황을 들러보고, 남강 치수사업과 경전남부선 철도의 연장, 김천~삼천포간 철도 부설 등의 건의를 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때부터 남강댐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연합신문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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