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교방예술 Ⅳ
진주교방예술 Ⅳ
  • 경남연합신문
  • 승인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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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특별한 이야기

진주권번

조선시대의 기생제도 하에서 기생은 관기(官妓)로서 궁중의 약방이나 상의원(尙衣院 : 왕의 의복이나 궁중의 일용품을 맡던 관부) 등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평소에는 약을 달이거나 바느질을 하다가 연회가 있을 때는 불려가 노래나 춤을 추었다. 국권을 상실한 후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서울의 기생들이 처음으로 조합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이 한성권번(漢城券番)이었다. 권번에서는 기생들에게 시문과 가무, 예의범절 등을 가르치고 모든 교육과정을 수료한 기생들이 요정에 나가 일하는 것을 관리, 감독하였다. 이후 권번이 계속 번창하여 지방에도 권번이 설립되었는데, 평양을 비롯하여 개성·함흥·남원·경주·진주 등지에 권번이 있었다. 이 권번은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질 무렵, 일제의 강압정책으로 폐쇄되었다.

1. 성립과 운영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왕조는 몰락하고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온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진주교방 역시 해체되고 교방의 후신으로 민간인에 의해 운영되는 예기조합, 즉 권번이 성립되게 된다. 진주권번은 당시 진주경찰서에 근무하던 최지환이 설립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여러 사람에게로 경영권이 넘겨지다가 지역유지이며 명망가인 서진욱이 권번장이 되었다가 다시 김창윤에게 그리고 김창윤의 사후에는 진주예기권번이라는 단체로 새롭게 출발한다. 1938년 11월 2일 자본금 오만 원으로 설립된 진주예기권번은 일종의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되었다. 최지환, 최두환, 전두옥, 박규석, 김동석, 정태범, 허억, 강주수 등 여덟 명이 자금을 공동 출자하였고, 사장은 최지환이 맡았으며, 전무취체역에 전두옥이 선임되었다. 진주예기권번은 이후 진주권번으로 불렸다.

2. 구성과 교육내용

진주권번이 번성하던 당시 소속된 기생수가 약 100여명에 이르렀고, 견습 기생만도 50~60명에 달했다는 점에서 일제시대 진주의 도시 규모와 비례하여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진주권번에는 입학은 있어도 특별한 형식의 졸업은 없었으며, 교육은 매우 엄격하고 다양하였으며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오전에는 용모, 복장, 예절 등 기생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가르쳤고, 서화, 국어, 시조, 창, 단가, 한문, 가야금 등을 배웠다. 오후에는 춤을 익혔으며, 희망하는 자는 개인교습도 받았다. 교육기간은 3년이며, 1반은 새로 입학한 학예, 2반은 2년된 학예, 3반은 3년된 학예로 편성하였으며, 이 과정을 모두 마쳐야만 “놀음”, 즉 공연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게 되고 연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3. 진주권번에서 유래한 진주의 전통춤

진주권번에서 유래한 전통춤으로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진주검무」와 1979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한량무」가 있다. 또한 1991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진주포구락무」, 1997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진주교방굿거리춤」도 진주권번에서 유래한 대표적인 전통춤이다.

4. 진주권번의 인물

진주권번과 관련된 인물로는 최순이(최완자), 조인자, 박규겹 등 진주권번의 선생이자 교방 출신으로서 진주권번의 1세대인 이들 외에 이윤례, 강귀례, 최예분, 이음전, 김수악 등을 들 수 있다. 최순이(최완자)는 진주춤의 기본틀을 새워 놓았을 뿐만 아니라 진주춤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67년 진주검무가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 받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윤례는 14세 때 진주권번에 입적하였으며, 후에 진주검무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강귀례는 광주권번 출신이었으나 진주권번에서 춤을 지도한 인물이다. 최예분은 진주권번 해체 이후에도 전통춤 발굴·복원을 비롯하여 후배양성에 힘을 쏟았던 인물이며, 이음전은 진주검무 기능보유자였다. 김수악은 진주검무와 진주 굿거리춤의 기능보유자로서 진주권번의 선생이었다.

[진주권번의 의의]

1919년 진주 남강변에서 “왜놈들 물러가라”고 목청껏 외쳤던 진주기생들이 있었다. 진주권번 소속 기생들이었다. 1919년 3월 19일 한금화를 비롯한 진주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경찰이 진주기생 6인을 붙잡아 구금하였는데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고 전해온다. 또한 일제시대 명월관의 진주기생 산홍은 친일파 인사 이지용이 천금을 주고 소실로 삼으려 하자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사람 구실하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소.”라며 단호히 거절하여 의기의 맥을 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제시대 진주 기생들은 단순히 연회에 나가 가무나 즐기고 자신의 영리만을 위해 살아오지는 않았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또는 진주권번의 일원으로 일제에 항거하면서 민족의 자주성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또한 진주권번에서 계승된 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시도문화재 및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와 같이 진주권번이 끼친 영향은 크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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