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

진양호는 1970년 최초로 지정 된 진주시의 대표공원으로서 진주 최고의 숲과 청정 호수를 보유한 도심 속 녹색 허브 거점공원이다. 한 때는 서부경남지역의 최고 명소로 인기를 누려 왔으나 점차 이용율 감소로 재개발의 필요성이 절실하여 대표공원으로서의 위상회복과 도시문화의 신재생 거점공원으로 재구축을 위하여 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발표한 가운데 진양호와 남강을 제대로 알아보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남강댐 공사 추진과정]

남강 치수사업을 포함하는 낙동강 개수공사는 1920년대부터 추진되어왔는데, 낙동강 개수공사는 본류 연안 개수계획과 남강 방수로 계획 및 부산운하 건설로 구분 계획되어 있었다. 1933년과 34년의 홍수, 특히 36년 진주시가지가 완전 침수되는 대홍수를 계기로 낙동강 상류인 남강 치수문제의 시급한 해결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진주대관』에는 「남강치수사업 해결」이라는 장을 두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경남 도청 이전 반대와 남강 치수사업 실시는 오랫동안에 걸쳐 진주 사람의 염원이고 특히 남강 치수사업은 1907년을 전후해 연달아 제창되었다. 전자는 1925년 봄 슬픈 종말을 알리며 부산으로 이전됐고, 후자는 1936년에 결정 시행되었다. 1908년경 실지 답사한 결과 남강 절개공사를 계획, 2백만원의 예산을 들여 진주의 하류 개양동을 기점으로 약 3리 밖에 있는 장양만(長養灣)에 이르는 운하를 개설하여 남강의 인공 관개용 수로를 만들고, 곁으로 경편철도도 부설하는 사업을 계획하여 출원한 바 있다. 또한 남강에 발전소를 세우고 부산-목포 간 전기철도 계획에 대해 총독부에서 실지답사를 함으로써 진주 주민은 곧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큰 변화가 올 것이라고 꿈꾸게 되었다. 이런 내용이 남강 치수사업과 수력발전사업의 기원이 되었다.

그 후 1920년 대홍수로 읍내의 80%가 침수되고서야 비로소 진주 남강 치수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1924년 가을 도청 이전이 발표되어 부득이 일시 중지되었으나 1925년 여름 또다시 남강 범람으로 진주읍내가 침수되자 총독부에 남강 치수사업 실시를 진정하게 되었고, 그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주에서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1933년에 이어서 1934년 7월 낙동강 연안 일대에 대홍수가 일어나자 총독부에 임시치수위원회가 설치되고 남강 치수문제가 일반의 주목을 끌기에 이르고, 도내 각지로부터 진정을 위한 상경이 이어졌다. 그때 총독이 치수현장을 직접 시찰했지만 궤도에 오른 듯했던 남강 치수사업은 실시되지 못하고 진주 사람들을 낙담시켰다.

1936년 8월 27일부터 28일에 걸쳐 큰 손해를 입히자 주민들은 남강 치수에 비장한 결의를 보이며 일어섰다. 산하 읍장, 기성동맹회로부터 진정이 이어지자 경상남도 내무부장은 현장을 바라보고 크게 놀라며 전화위복이 올 것이라고 타일렀다. 이 말 한 마디에 주민들은 강력한 자극을 주었고 결의를 다졌다. 드디어 낙동강 본·지류 피해 연안지역의 도회의원들이 일어나 9월 20일 부산호텔에서 수해대책의 협의회를 연 결과 총독부에 진정키로 하고 도 당국의 양해를 얻어 22일 총독부를 방문하여 진정했다.

10월 24일 오후 실무 관계자들이 진주를 방문하자 남강 문제의 앞날에 한 가닥 희망을 걸게 되었다. 25일 이른 아침 상류를 조사하고 평거면 제방 몇 곳의 암반·토질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군수·읍장 등과 함께 답사를 수행하였다. 지도로 실지를 조사하고 나동면 유수리의 굴착된 부분도 검사했다. 또한 사천군 내 계곡을 답사하고 축동면 가산리로 나와 방수구의 검사도 끝내고 개양으로 왔다.

10월 30일 밤 치수위원으로부터 남강 치수사업의 즉시 시행이 치수위원회에서 의결되었다는 전보가 날아들어 진주읍민은 환희와 흥분이 절정에 이르렀다. 11월 3일 치수조사위원회 통과를 축하하고 앞날을 축복하려는 읍민 집회가 열렸다. 총독부 예산은 통과 5개년 계속사업으로서 1937년 3월 25일 총독부 토목국 부산출장소에서 기본조사에 착수, 그해 10월부터 나동면 유수리의 방수로 공사장에서는 굴착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는 10수년에 걸친 일로 많은 희생과 노력으로 드디어 해결의 날이 돌아온 것이다.”

 

[해방 이후 남강댐 추진과정]

남강 다목적댐은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인 1920년 낙동강 종합개수계획의 일부로서, 남강 방수로사업은 해방 당시 70%의 공정이 진행되었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1936년 착공한 이래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듭한 끝에 공사는 1962년 경제개발5개년사업으로 본격적으로 다시 착공되어 1969년에 준공되었다. 높이 21m의 중력형 콘크리트 댐을 쌓고, 삼계리 쪽으로는 방수로를 개척하여 사천만까지 11㎞의 인공방수로를 개설하였다. 이 공사의 효과는 홍수 시 사천만으로 방수하여 낙동강 계획 수위를 50~70㎝ 낮추는 것이다. 즉 홍수 시 수위를 낮춤으로써 남강 하류의 연안에 제방을 수축하여 좁아진 하도의 범람을 방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댐과 방수로를 건설함으로써 홍수 시에도 진주시가지의 안전이 보장되며 남강 하류의 범람원이 농경지로 추가적으로 확보되는 반면, 대평면을 중심으로 한 경호강 유역은 저수지로 수몰되는 것이다.

 

[1980년대 숭상공사]

남강댐 건설 후 20여년이 지난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 토지 이용의 증가와 인구의 도시집중화 등에 따라 각종 용수 수요가 증가하였고, 홍수는 빈발하여 기존 댐의 안전면에서도 기능 증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기존 댐은 계획홍수량 10,570㎥/s 유입 시 남강 본류로 2,000 ㎥/s, 사천만으로 5,460㎥/s를 방류하며 저수지내 3,110㎥/s를 저류하도록 계획되어 있으나, 남강 본류 진주시 지역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800㎥/s의 방류를 초과할 수 없으며, 사천만 지역 또한 방류수로 인한 만내의 수위 상승으로 연안 농경지의 침수 피해 발생이 잦아 방류량의 축소가 요구되고 있다. 한편 홍수 조절 용량은 유입 홍수량에 비해 아주 적어 댐의 안전을 위하여 수위를 만수위 이하로 유지하지 않을 수 없어 용수 공급 능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기존 댐의 용수 공급 능력은 진주시와 사천시의 생활·공업용수 210천㎥/일로 계획되어 있으나 홍수 조절을 위하여 저수지를 비워놓아야 하는 실정이어서 광역 상수도사업에 의한 신규 용수 수요의 증가로 능력의 한계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존 남강댐 하류에 보강 댐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1987~1989년간에 타당성 검토 및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통하여 기존 댐 위에 덧쌓기로 하는 방안도 검토하였다. 그러나 제반 여건상 기존 댐 하류 지점에 새로이 축조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또한 댐 형식에 있어서는 현지의 여건을 고려하여 콘크리트 표면 차수벽형 석괴댐으로 설계하였다.

1970년 완공된 남강댐이 남강유역의 홍수조절에 중점이 있었다면, 1989년 착공된‘남강댐 숭상공사’로 불리는 새로운 댐건설은 생활·공업용수와 관개용수 등 용수 확보에 중점이 있다. 용수가 공급되는 지역 범위가 진주에서 통영·고성·사천 등으로 확대된다. 저수량을 증대(190만 톤에서 309.2만 톤으로)시키기 위하여 댐의 높이도 21m에서 34m로 높이고, 대평면을 비롯하여 침수지역의 1,100가구가 추가로 이주함으로써 경호강은 더 큰 저수지로 변화되었다. 이로써 생활공간으로서 대평면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고 덕천강의 수곡면도 상당 부분 수몰지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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