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호와 남강유역 Ⅳ

 

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

진양호는 1970년 최초로 지정 된 진주시의 대표공원으로서 진주 최고의 숲과 청정 호수를 보유한 도심 속 녹색 허브 거점공원이다. 한 때는 서부경남지역의 최고 명소로 인기를 누려 왔으나 점차 이용율 감소로 재개발의 필요성이 절실하여 대표공원으로서의 위상회복과 도시문화의 신재생 거점공원으로 재구축을 위하여 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발표한 가운데 진양호와 남강 본류에 흘러드는 덕천강과 경호강 유역의 보와 관개시설에 대하여 제대로 알아보고자 한다.

보와 관개시설

보와 관개시설은 진주지역의 농업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물을 공급하는 시설로써 조선시대에는 덕천강 유역에서 수전농업(水田農業)이 크게 발달하였다. 적어도 덕천강 유역의 농업지대는 진주지방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을 것이다. 그래서 진주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적 사건과 활동을 해석하는 데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에 대한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조선 초기에 남명 조식(曺植)이 덕천강 상류 덕산에 정착할 바로 그 무렵에 보의 관개체계가 이 지역에 확산되고 있었다. 또한 진주농민항쟁이 덕천강 유역에서 시작된 것도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선 전기의 수전농업은 광활한 평야지대에서 발달하지 않고 흔히 산간지방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덕천강으로 발달하여 진양호에 유입된다.

우리나라에서 하천수를 이용한 관개체계에 대한 관심은 고대로부터 있었으나, 고려 말 혹은 조선 초에 들어와서야 하천수를 본격적으로 관개용수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보와 제언의 수에서 영남지방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수전농업이 영남지방의 소규모 하천 유역에서 먼저 발달한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이 될 것이다. 영남지방 내에서는 특히 진주지방에서 덕천강유역의 수전농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여지도서』에서는 진주지방 수전(水田)의 결수는 경상도 전체로 보아 가장 넓은 면적으로, 비옥도뿐만 아니라 미곡의 총생산량도 단연 앞서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진주지방이 남원·구례·성주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확량이 높은 비옥한 지방으로 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

 

지리산과 진주 진양호를 연결하는 덕천강

덕천강은 지리산의 남동 사면에서 발원하여 진주에 이르러 진양호에 흘러들며 남강(南江) 본류와 합류하는 하천이다. 지리산 천왕봉(天王峯)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수많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소규모 하천들은 산청군 시천면 원리, 일명 덕산(德山)에서 합류하여 덕천강을 이룬다. 이 덕천강은 산청군 시천면과 단성면, 하동군 옥종면, 진주시 수곡면, 사천군 곤명면, 진주시 내동면 등을 통과하여 진양호로 유입된다.

이 덕천강 유역의 저지대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보(천방) 관개체계가 발달하였고, 이에 의존하여 수전농업이 발달하였다. 오늘날 덕천강 유역의 농경지는 다른 대규모 하천 유역의 농경지에 비하여 규모가 작지만, 조선시대에는 덕천강 유역에서 발달한 수전농업의 규모가 경상남도 서부지역의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하여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지방에서는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이 가장 큰 규모였다고 판단된다. 수전농업의 발달로 인하여 농업생산력이 증대됨으로써 덕천강 유역은 진주지방에서 중요하고 역동적인 인간 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진주 영역은 오늘날의 통합 진주시 영역보다 훨씬 광대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진주목 자체의 강역은 서쪽으로 섬진강에 접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는 천왕봉에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현재의 함양군 미천면 및 산청군 금서면과 접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창원군 진전면의 일부 지역까지 미치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사천군 축동면, 구 삼천포시의 일부 지역과 남해군 창선면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진주 영역에서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활동이 덕천강 유역을 중심으로 자주 일어났는데, 이러한 덕천강 유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나 활동은 덕천강 유역의 농업활동이나 농업생산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진주와 지리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농업생산성이 높은 비옥한 곳으로 기술하고 있다.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도읍이며, 높은 문무관이 많이 나온 도읍이다. 토지가 비옥할 뿐만 아니라 강산의 경치도 좋아 사대부들은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고 주택과 정자 꾸미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지리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가 끝나는 부분으로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이런 까닭으로 온산이 풍년과 흉년을 모르고 지내므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지리산에서 발원이 되어 진양호로 흘러드는 덕천강 유역은 지리산지에 속하면서도 진주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덕천강 유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셈이다.

조선시대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

『진양지』에 의하면, 덕천강 유역에 거주하던 참봉 조정(趙程)이 농민들과 함께 명월암(明月岩) 옆을 뚫어 물길을 내고, 다회탄(多會灘)[현재의 덕천강을 말함]을 막아 명월암방천(明月岩防川)을 만들고, 그 물을 원당촌 앞의 넓은 평야에 관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832년(순조 32)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도읍지』에는 진주지방 보의 이름과 규모, 그리고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읍지』에 기록되어 있는 진주지방의 보는 총 18개인데, 이 중 8개가 덕천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경상도읍지』에 의하면, 덕천강 유역은 영천강 유역과 더불어 진주지방에서 수전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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