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출신 재상 강혼과 기녀의 로맨스

옛날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던 진주지방에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선비와 기녀’이야기가 있다. 「강혼의 로맨스」라는 전설이다. 목계(木溪) 강혼(姜渾)[1464~1519]은 젊은 시절 한때 아리따운 관기와 깊은 사랑을 불태운 일이 있다. 강혼이 기녀와의 사랑에 빠져 있을 무렵, 공교롭게도 진주목사가 부임해왔다. 새로 온 목사가 기녀들을 일일이 점고하는데, 강혼의 연인이 목사의 눈에 들어 수청을 들게 되었다. 강혼은 사랑하는 기녀를 속절없이 빼앗기게 되었다. 더욱이 관기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혼은 북받쳐 오르는 분함과 연정을 주체할 수 없어 수청을 들러 가는 기녀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한 수의 시를 소매에 써주었다. 강혼의 행동에 놀란 기녀는 저고리를 갈아입을 생각마저 잊어버리고 엉겁결에 신관 목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쫓기듯 들어서는 기녀의 소맷자락에 쓰인 시를 발견한 목사는 그 연유를 물었다. 시의 작자가 누구냐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기녀는 밝히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는 잡아들이라는 호통이 떨어졌다. 강혼이 붙들려 왔다. 수청 기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전들은 큰 변이 일어났다며 몸둘 바를 몰라 하는데, 사또는 뜻밖에도 주안상을 준비케 하고 백면서생 강혼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사또는 기생의 소맷자락에 쓰인 시를 보고 그의 글재주와 호기에 마음이 끌려 한 잔 술은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수청을 들 뻔한 기생도 되돌려 주고자 작정한 것이다.

강혼은 1464년(세조 10) 진주 월아산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주,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 14년(1483)에 생원시에 장원을 하고, 성종 17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춘추관 등에서 벼슬을 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나 문장과 시로써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도승지가 되었다. 영의정 유순의 주선으로 반정(反正)에 참여하게 되어 그 공으로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3등에 진천군(晋川君)에 봉해졌다. 그 뒤 좌승지를 거쳐 대제학, 공조판서가 되었고, 중종 7년(1512)에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며, 뒤이어 우찬성 판충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金馹孫)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진주사람 강혼은 시문에 능통했으며 대제학까지 지낸 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제학까지 지낸 학자인 강혼에게 ‘기생과의 로맨스’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야기의 근원 역시 그의 문집에 있다. 우선 후손이 쓴 가장(家狀)에 그 기록이 있다. “그 후 목사가 진주에 부임을 해서 좋아하는 기생에게 수청을 들라 하니 장난삼아 시 한 편을 기생의 옷에 써주었다. 목사가 보고 크게 놀라 실용적인 학문을 권하였다(其後 方伯入本州 以所眄妓薦枕 卽戱題一絶於妓 方伯見之 大異 遂勖以實學)”라는 글이다. 강혼이 이때 기생의 소매에 써준 시 역시 「증주기(贈州妓)」라는 제목으로 문집에 실려 있다.

高牙大纛三軍帥

목사는 삼군을 통솔하는 장군 같은데

黃卷靑燈一布衣

나는 한낱 글 읽는 선비에 불과 하네

方寸分明涇渭在

마음속에는 좋고 싫음이 분명할 텐데

不知丹粉爲誰施

몸 단장은 진정 누구를 위해 할까

강혼은 사랑하는 기녀가 마음속으로는 자기를 좋아하지만, 목사의 권세에 못 이겨 억지로 수청 들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한 편의 시를 기생의 소매에 써준 것이다.

이 시에는 “진양지에 이르기를, 판서 강혼이 젊은 시절 관기를 좋아했는데 방백이 부임하여 수청을 들게 하니 공이 시 한 수를 지어 기생의 소매에 써주었다. 방백이 보고 누가 지었는지 물었다. 기녀가 공이 지었다고 대답하자, 불러 보고 크게 칭찬하고 과거공부를 권하였으며, 마침내 문장으로 이름이 드러났다”라는 주(註)를 달아놓았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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