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신라문화보존회
회장 김영규

신라가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내 주었을 때 신라왕자 마의태자는 비단옷을 삼베옷으로 갈아입고 망국의 슬픔을 되씹으며 개골산(금강산)에 입산했다. 일부 역사가는 이를 두고 태자의 신분에서 평민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평민들의 의복인 삼베옷으로 갈아입은 것이라고 단순히 해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직계가족이 상을 당하면 삼베옷을 입듯이 여기에는 신라의 망국과 왕의 폐위로 인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사회과학적 철학의 깊이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삼베에 얽힌 애환은 아낙들의 한숨으로 그치지 않는다. 조선 초기 정종 때 여진족에게 되찾은 육진지역에서는 관에서 아들을 낳자마자 군적에 올려 병역세인 군포를 거둬들였다. 이 군역세가 얼마나 혹독했던지 서민들은 이를 면하기 위해 사내아이를 낳으면 고추를 잘랐다는 참혹한 정경이 기록에 남아있다. 유계‘포남집’에는 이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처럼 혹독하고 수탈에 가까운 군포 탓인지 당시 서민들은 삼베를 곱게 짜지 않았다. 베가 거칠 뿐만 아니라 베 폭도 좁아 관에서는 머리를 짜내 질이 좋은 베를 짜면 세 사람 몫을 한 사람 몫으로 계산해주기도 하고 가장 질이 좋은 베는 6년 군포를 대신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육진지방에서는 삼베를 일컬어 부녀자들의 원한이 올올이 맺혀 있다고 해서‘원포’라 부르기도 했다.

삼베는 억세고 질겨 농사일에도 제격이었다. 특히 여름철은 농민들에게 길매기, 거름주기, 물대기 등으로‘자기 밭에 오줌을 눌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농번기다. 이렇게 바쁜 시기에 더위를 쫒아줄 뿐만 아니라 작업복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 삼베옷인 것이다. 논일이든 밭일이든 농민들은 삼베옷을 입고 나섰으며 옷감이 질겨 한 벌 장만하면 10년 이상은 입을 수 있었다. 삼베바지 자락을 걷어 올리고 논이나 밭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일에 열중하는 농민들의 모습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작품에서 보듯이 전통적인 풍경의 하나이다.

삼베는 더운 여름철을 나는데 제격이다. 한반도는 해양성 고기압이 지배해 지루하고 습기 찬 무더운 여름이 길게 이어진다. 명주나 털 같은 동물성 섬유가 피부에 잘 붙은데 비해 삼베와 같은 식물성 섬유는 까슬까슬한 것이 피부에 잘 붙지 않으며 몸에 꼭 맞지 않고 여유 공간을 만들었다.‘옷이 몸에 붙으면 복 들어갈 틈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의 의복생활에서 이러한 여유 공간은 삶의 지혜임을 알 수 있다.

선문답을 즐기는 고승들의 이야기에 이런 삼베옷의 시원함을 ‘부처’에 비유한 예가 있다. 한 수행승이 물었다.“무엇이 부처입니까?”더운 여름에 삼베옷을 입고 있던 고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마삼근”몸을 덥지 않게 해주는 삼베옷을 부처로 보고 그것에 감사한다고 말한 것이다.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불자들에게 한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게 해주는 삼베옷도 부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삼의 재배는 엄격히 제한을 받고 있다. 삼에는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물질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대마초는 바로 이 삼을 가지고 만든다. 한때는 농촌마다 심어져 있던 삼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철커덕 척, 철커덕 척“ 이제 우리 주위에서 이런 베틀 짜는 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 특히 최근에는 값싼 중국 삼베가 물밀듯이 밀려와 서민들에게는 삼베로 만든 제품들을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고 있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삼베문화는 사라지고 있으며 전통 의복문화도 바뀌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삼베를 짜는 물레 소리를 다시는 듣기 힘들 것 같다.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경보에 선조들의 환경적 지혜의 산물 삼베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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