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특별한 이야기

[삼일만세의거에 참여한 진주기생들]

1919년 진주 남강 변에서 “왜놈들 물러가라”고 목청껏 외쳤던 진주기생들이 있었다.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었다. 기생조합은 나라가 망할 무렵 교방이 해체되자 교방의 노기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으로, 뒤에 권번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은 진주교방의 맥을 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19년 3월 19일 한금화(韓錦花)를 비롯한 진주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진주기생 6인을 붙잡아 구금하였는데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고 전해온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3월 29일에는 수원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이 검진을 받기 위하여 자혜병원으로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김향화(金香花)가 선두에 서서‘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뒤따르던 여러 기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따라 불렀다. 이들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경찰서 앞에서 다시 만세를 부르고 헤어졌다. 이 사건으로 주모자 김향화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1919년 3월 31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기생들이 만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십구일 오전 십일 시 반 경에 수원조합 기생 일동이 자혜병원으로 검사를 받기 위하여 들어갔다가,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몰려 병원 안으로 들어가 뜰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서 앞으로도 나왔다가 해산했는데, 조합원 중에 김향화는 경찰서로 인치 취조하는 중이더라”한 것이 보인다.

진주기생들의 만세의거 사실 역시 당시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1919년 3월 25일자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이라는 기사에 “십구일은 진주기생의 한떼가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여섯 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 있다더라.”라고 적혀 있다. 이때 기생들의 만세의거는 진주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고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거이다.

[매국노 꾸짖은 진주기생 산홍]

『매천야록』 광무 10년(1906)조에 “진주기생 산홍(山紅)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때 을사오적의 하나로 지목되는 매국노 이지용(李址鎔)[1870~1928]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글도 잘 쓰고 얼굴도 예쁜 진주기생 산홍이 이지용의 첩이 되길 거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이지용이 누구인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적극 찬성하여 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다.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니, 그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였다. 1906년 을사오적 이지용이 진주를 방문했다. 그가 진주를 방문한 흔적은 촉석루 벼랑에 그의 이름을 새겨 놓은 데서 알 수가 있다. 이때 이지용은 진주기생 산홍에게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주고 첩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자 산홍이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고 거절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절개를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매천야록』에 그때의 일을 기록해 두고 있는 것이다.

양회갑(梁會甲)[1884~1961]은 「기녀 산홍이 매국노의 죄를 나무라며 잠자리를 거절하고 스스로 죽다(妓山紅 數罪賣國 賊不許寢 自死)」라는 시를 지어 산홍의 절개를 칭찬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 달라고 했는데, 기녀의 신분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이 일을 들은 어떤 사람이 이지용에게 시를 지어 주면서 희롱까지 하였다. 매국노에게 당당히 맞선 산홍은 당시 진주기생의 기개를 만천하에 과시한 셈이 되었다. 산홍은 선배 기녀인 의기 논개의 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참배하고 시 한 수를 남겼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논개는 왜장을 안고 몸을 날려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건만, 자신은 일없는 세상에 태어나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