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조선통신사 10

윤유숙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1811년 통신사는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마지막 사행이었으며 의례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었다. 사행단의 최종 도착지는 쇼군이 있는 에도가 아닌 쓰시마로 변경되었고, 사행단의 규모도 총인원 320여 명(혹은 330여 명)으로 종래에 비해 대폭 감소하였다. 이 통신사는 ‘도쿠가와 이에나리家齊의 쇼군 계승 축하’를 명분으로 했는데, 방일은 이에나리가 쇼군직에 오른 1787년으로부터 무려 24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일본의 사회 불안도 심각해서 18세기 후반 ‘텐메이天明 대기근’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농촌뿐 아니라 대도시까지 서민들의 봉기와 폭동이 확산되고, 러시아가 남하하여 막부에 통교를 요구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막부의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가 검약과 농촌의 안정을 추구하는 관정개혁寬政改革을 실시했으나 사태는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쓰시마 역시 극도의 재정 궁핍에 빠져 있었다. 쓰시마의 조선 무역은 17세기 말 공전의 활황을 띠었으나, 사행은 성사되기까지 그 과정부터가 험난했다. 이러한 변화는 왜 생긴 것일까. 우선 조일 양국의 재정 악화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재天災로 인해 기민饑民이 대규모로 발생하였고, 당쟁의 격화가 만성화되어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의 공급조차 부 1690년대부터 계속된 일본 은화의 품위절하品位切下가 조일 무역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국산품 증가에 따른 수입품의 국내 가격 하락 때문에 종래 일본 은과 중국산 견직물류·조선 인삼을 축으로 하던 쓰시마의 무역은 큰 이익을 창출할 수 없게 되었다. 조선 인삼과 일본 은의 교환 체제는 1세기여 만에 붕괴되었고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로 넘어가며 조선의 소가죽과 일본의 구리銅가 주요 무역품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허나 구리의 산출 부진과 그로 인한 가격 상승, 쓰시마의 재정난 등이 작용하여 점차 막부가 허가한 액수의 구리도 구입하지 못하는 해가 속출했다.

18세기 중기부터 쓰시마는 조선 무역의 쇠퇴를 명분으로 내세워 막부에 특별 지원금의 하사를 요청했고 그 하사금과 차입금으로 번의 재정을 힘겹게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쓰시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1750년대에 ‘조선 무역은 파탄이 난 것이나 다름없고, 이런 상태에서 통신사 호행護行은 불가능하다’고 비관적인 전망을 했을 정도였다.

1787년 쇼군 이에나리가 즉위하자 쓰시마는 통신사 초청에 따르는 막부 지원금을 일시에 차입하려는 의도에서 통신사 초청을 막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막부는 통신사의 초청을 연기시켰다. 통신사 왕래 중에 일본에서 기근이나 대규모 폭동이 발생할 것이 염려되었고, 무엇보다 각 번의 입장에서도 거액의 지출을 요하는 행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1791년이 되자 막부는 통신사 의례를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거행하는 방안을 제안하도록 명했다. 조선 측은 통신사 파견 연기에 동의한 상태에서 재차 이를 변경하는 것은 불손한 처사라고 반발했지만 결국 쓰시마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그 뒤 쓰시마에서 발생한 내분과, 사전 교섭을 하기 위해 쓰시마에 건너간 조선의 역관을 뇌물로 공작한 사실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다시 분규가 일어났다.

이처럼 새로운 형식의 통신사행에 관한 교섭이 난항을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쓰시마에서 의례가 거행되었다.

장소를 바꾸어 외교 의례를 행하였다는 의미에서 1811년 통신사를 ‘역지통신易地通信’ 혹은 ‘역지빙례易地聘禮’라 칭한다. 개정된 의례에 의하면 쓰시마에서 행해진 역지통신은 종래 쇼군의 에도 성에서 치렀던 의례를 쓰시마에 있는 번주 소씨宗氏의 저택에서 행하되, 사행단의 규모와 상호 예물을 축소하며 마상재, 전악典樂 등을 폐지하는 형태였다.

에도에서도 쇼군의 대리인인 상사上使, 부사副使, 막부의 관료 등이 쓰시마로 와서 통신사 일행을 맞이했다. 이 의식을 위해 통신사 일행과 막부의 빈객 접대, 객관의 신개축, 도로나 항구의 수리 등등 총액 38만 3천 냥 남짓이 투입되었다. 종래 통신사의 에도 의례에 소요된 총비용이 막부와 다이묘들을 합해 100만 냥현재 700억엔 이었다고 하니, 역지통신은 종전 비용의 약 40% 선에서 치러진 셈이었다.

그 후에도 이에요시家慶를 비롯하여 이에사다家定, 이에모치家茂, 요시노부慶喜 등 4명의 쇼군이 쇼군직을 계승할 때마다 쓰시마는 통신사를 초청하고자 시도했다. 그럴 때마다 사전 교섭 과정에서 조선은 일본의 초청에 동의하는 입장을 표명했으나 조선의 재정적인 문제, 막부 내의 실력자 교체, 쇼군의 사망 등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행은 번번이 연기되고 말았다. 주목할 점은 조선 후기에 조선통신사의 내빙이 쓰시마를 필두로 한 일본의 요청을 전제로 했다는 사실이다.

헌데 19세기에 일본은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에 직면하여 그들과의 관계 설정이 불가피해졌고, 동시에 대외 관계의 재편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격렬한 의견 분열이 가속되었다. 서구 열강을 향한 관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선에 대한 관심은 감소하여 도쿠가와 정권이 동요하는 50여 년간 통신사행은 한 번도 성사되지 못하다가,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맞았다. 메이지 정권이 쓰시마를 대신하여 대조선 외교권을 장악하면서 종래의 교린 체제는 급속하게 붕괴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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