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특별한 이야기

[천하가객 안민영이 반한 진주기녀 비연]

중국 한나라 여인 비연(飛燕)은 뛰어난 몸매에 가무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한나라 성제(成帝)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비연’이 중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선에도 있었으니 바로 진주 기녀 비연이다. 비연은 진주에서 뛰어난 미모와 몸매로 뭇 사내들은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소문은 곧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다. 당시 최고의 가객(歌客)이라고 할 수 있는 안민영(安玟英)이 소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비연을 만나러 진주로 달려왔다.

안민영은 자를 성무(聖武), 호를 주옹(周翁)이라 하였으며, 서얼 출신으로 조선 말 제1의 가객이다. 고종 13년(1876) 스승 운애(雲崖)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조선 역대 시조집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 간행하여 근세 시조문학을 총결산하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당시 안민영은 풍류객답게 전국을 유람하며 각처의 기녀들과 즐기면서 시로 그 감흥을 드러내고 있다. 진주에도 여러 번 와서 난주·초옥 등 진주 기녀들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비연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가 비연을 만나러 천릿길 진주를 찾았을 때, 비연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당시 진주 외촌(外村)에 살고 있던 거부 성진사의 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8도의 기녀를 마음대로 주무르던 안민영이었지만, 비연은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비연을 만나기 위해 많은 패물을 준비해온 안민영을 어떻게 해서든지 비연을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일면식도 없는 남의 여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기방에 찾아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온 안민영은 패물로써 비연을 아는 사람을 회유했다. 그 사람을 통해 비연을 한번 만나고 그 감회를 억누를 수 없어 시로 남기기까지 했다.

이 이야기는 안민영의 개인 시조집 『금옥총부(金玉叢部)』에 전해온다. 이 시조집은 안민영이 70세 되던 고종 22년(1885)에 이뤄진 것으로, 『가곡원류』보다 9년 늦게 만들어졌다. 그는 80세까지 생존하면서 만년까지 작품활동을 계속한 정력가이다.

[진주기녀 난주]

안민영은 진주 기녀 난주(蘭珠)를 무척 총애했다. 그가 진주에 왔을 때 그녀를 위해 시조 2수를 지었으니, 「진양기녀 난주를 칭찬하다(讚晋陽蘭珠)」와 「진양기녀 난주를 시제로 함(題晋陽妓蘭珠)」이다.

진양 기녀 송옥과의 인연 또한 남달랐다. 안민영이 진주에 머물 때 물과 풍토가 맞지 않아 풍병이 들어 여러 약을 썼으나 조금도 약효를 얻지 못하고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이때 한 의원이 말하기를 “이 병은 매우 위중해서 만약 동래 온천에 가서 삼칠일 동안 목욕을 하지 않는다면 다시 회복될 수 없다”고 했다. 안민영은 즉시 진주를 떠나 마산포와 창원을 거쳐 동래로 향한 일이 있었다. 안민영이 진주에서 사경을 헤맬 때 따뜻한 위로의 편지를 보낸 기녀가 바로 송옥이었다.

[영변땅에서 망향가 부른 진주기녀 채란]

1924년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은 오랜 방황 끝에 고향 영변으로 돌아와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귀향이었지만 그동안의 실의와 좌절이 컸던 탓인지 마음의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도 하고 영변에 머물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김소월이 영변에 머물고 있을 때, 우연히 한 기녀를 만나게 된다. 이 기녀는 어릴 때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개가할 밑천을 장만하려고 자신을 전라도 행상에게 팔았다.

전라도 행상에게 팔린 신세가 된 기녀는 이리저리 팔도를 떠돌게 된다. 팔도를 떠돌다 급기야는 남으로 홍콩, 북으로 다이렌과 텐진에 이르게 되었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멀리 외국으로 떠돌다 어찌어찌 해서 평안북도 영변 땅에 오게 됐고, 민족시인 김소월을 만났던 것이다. 이 기녀가 바로 진주가 고향인 채란이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홍콩, 중국 등지를 떠돌다 조선에 돌아와 고향과 천리나 떨어진 영변 땅에 도착한 채란은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멀리 남쪽 고향 진주 땅을 바라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팔베개의 노래」를 부른다. 이때 김소월은 문득 담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 저편에서 들려오는 슬프고 절절한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채록하여 「팔베개의 노래조(調)」라는 민요시를 지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김소월의 시밖에 없으므로 채란이 불렀던 노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김소월의 시와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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