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김창현
전 동우대 교수
아남프라자 대표이사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수심결(修心訣)에 '섬개투침(纖芥投鍼)'이라는 말이 나온다. '섬개투침'은 작은 겨자씨를 공중에 던져놓고 바늘을 던져 그 겨자씨를 관통시킨다는 말이다. 그만큼 사람 몸 받기 어렵고, 정법(正法)을 만나거나 깨달은 성자(聖者)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지금은 50년 전 일이 되었지만, 내가 불교신문에 근무하면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을 되돌아본다.

나는 결혼식을 1972년 동국대 안에 있던 조계종 총무원에서 올렸다. 돈이 없어 총무원 강당을 직접 청소하여 식 올리고, 신혼여행은 법주사로 갔다. 그때 총무원장 석주스님은 가난한 기자에게 우순풍조(雨順風調)란 뜻 깊은 휘호를 써주셨고, 월주스님은 집 없는 사람에게 고대 옆 개운사 경내에 있던 민가에서 살라고 하셨다.

이 시절 가장 귀중한 체험은 아마 고승 인터뷰였을 것이다. 중생이 사람 몸 받고 태어나기도 어려운데, 나는 수많은 고승대덕과 정법(正法)을 만났다.

10년이란 시간을 토굴 속에서 면벽참선하고 나온 스님의 얼굴빛은 어떨까? 나는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참선 회향한 손경산 스님을 신비롭게 생각했다. 그래 맨 처음 인터뷰하여 그 모습을 독자에게 전달했다. 기독교의 구약 신약처럼, 한 종교에 경전이 없으면 되겠는가? 그렇다고 그 많은 팔만대장경 경전을 다 읽으라고 하겠는가? 1972년 역경원에서 한국 최초로 간략한 <불교성전>을 펴냈다. 나는 그 큰 일을 해낸 역경원장 운허스님을 남양주 봉선사로 찾아갔다. 운허스님은 천재였던 춘원 이광수 사촌이고,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공부가 돋보이던 큰스님이다. 나는 스님을 숲속에 웅크린 범 같은 분이라고 소개했다.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램지 대주교도 만났다. 그 분이 동국대 이사장실에서 불교 지도자들과 대담한 <기독교의 신비사상과 불교의 성불사상>을 취재 보도했다. 참선 배울려고 송광사 구산스님 따라온 하바드 출신 벽안의 납자들 인터뷰도 했다. 이분들이 지금 서양에서 불교학자로 이름난 분들이 되었다.

그 밖에 총무원 안에서 자연스레 월하, 전강, 대의, 탄허, 녹원, 지관, 경보, 무진장 스님 등 한 시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을 만났다. 참선에 대해 알고싶어 몇 스님은 자주 찾아가 괴롭히기도 했다. 광덕, 법정, 월주, 설조스님은 불교신문에서 직접 모시고 보고 배웠고, 외부에서 원고 주시던 이희승, 이항녕, 이병도, 황산덕, 서정주 교수댁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해인사로 방송작가 초청하여 템풀스테이 시킨 일도 기억에 새롭다. 신혼이라고 취재길을 아내와 함께 갔다. 그때 신랑 따라가 방송작가들한테 인기 독차지한 그 새댁이 지금 70 넘었다. 이서구 신봉승 등 두 대 버스에 동승한 원로작가 70여명이 해인사로 가서, 선방 스님 일상을 1주일 참관한 후부터 절 집안에 대한 인식이 확 달라졌다. 그후부터 그들이 쓴 드라마는 중이란 말 대신 스님이란 표현으로 바뀌었다.

불교신문 근무 중 가장 뜻깊은 일은 4월 초파일 공휴일 제정 청원에 앞장 선 일이다. 이 소송의 불씨는 풍전상가에 있던 대학생 불교연합회에서 불교신문에 보낸 초파일 공휴일 제정 청원 기사였다. 그 기사를 접한 나는 매우 뜻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관심있게 크게 보도했다.

그러다가 1973년 어느 날 일간지 귀퉁이에 실려 잘 보이지도 않는 사월초파일 공휴일 제정 촉구 1단짜리 작은 기사를 발견했다. 용태영 변호사란 분이 낸 청구소송이었다. 그래 물어물어 사무실을 찾아갔고, 기자를 반기던 그 분을 총무원에 소개했다. 그 후 그 분이 조계종의 초파일 공휴일 제정 자문위원이 되어, 법적인 제 절차를 진행하여 재판에서 승소한 것이다. 당시 재미있던 일은 솟장에 기록된 피고는 정부를 대변하는 총무처 장관이고 원고는 조계종이다. 그런데 재판 중에 대구 불자들이 버스를 수십대 동원하여 법정을 가득 메웠을 때, 피고 총무처 장관의 장모되시는 보살님도 사위를 피고로 만든 그 소송에 참여했던 점이다. 소송이 승소한 까닭은 당시 불교신자는 8백만, 기독교 신자는 4백만인데, 12월 25일 성탄절만 공휴일이라면 종교간 형평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소송이 고법에서 각하되어 대법원에 즉각 상고했고, 곡절 끝에 박정희 대통령께도 청원서 보냈고, 결국 1975년 1월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여 결정된 것이다. 이때가 경산스님이 총무원장 하시던 때다.

불교신문 기자로서 절 구경 많이 한 것은 당연하다. 해인사도 가보고, 송광사도 가보고, 청담스님 계신 도선사, 성철스님 계신 해인사, 비구니 도량 진관사 다 가보았다. 통도사 홍매화, 선운사 동백, 백양사 단풍 다 구경했다. 산은 오대산, 설악산, 지리산, 달마산 모두 신선의 산이요, 거기 절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는 모두 신선의 음악이다. 때로 마조(馬祖) 백장(白丈)의 어록도 읽었고, 진각, 원감, 태고, 서산대사의 오도송과 임종게도 읽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나는 이 좋은 인연을 버리고 딴 길로 새버린 것이다. 불교신문이 주간지라는 것이 맘에 걸려 일간지로 옮겼고, 그 후 기업체로 옮겨 재벌 비서실장과 회사 대표 거쳐 대학교수로 은퇴했다. 이제 생각하니 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세달사 장원관리인 조신스님 같다. 사바의 진흙탕을 한평생 뒤집어 쓴 이후에사 꿈을 깨었다. 늦게나마 이제 새벽에 일어나면 불교방송 들으며 <반야심경> 독송하고, 108배 참회의 절 올린다. 생각해보면 첫직장 불교신문이, 내가 이 세상에서 맺은 인연 중 가장 복된 인연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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