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죽음에 관한 기록]

○ 전 진주 별장 윤적보(尹啇輔) 등의 진정서(등장, 等狀, 1721)

“진주성이 짓밟히던 날 장수와 벼슬아치, 수령과 장군, 이렇게 피로써 싸우던 서른 남은 사람들이 모두 꿋꿋이 버티다가 의롭게 죽은 다음에 오직 한 사람 논개라는 기생이 남아서 문득 나라를 위하고 도적을 죽일 수 있는 계책을 떠올렸습니다. 고운 옷을 입고 홀로 강 언덕 우뚝한 돌 위에 앉아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성 위의 왜적 가운데서 우두머리 하나가 보고 아름답게 여겨 곧바로 논개 앉아 있는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논개가 슬쩍 맞이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 왜장이 즐거운 생각에 빠져 마음 놓고 서 있는 사이에 논개가 왜적을 와락 끌어안고 강물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바위는 강 언덕과 떨어져 있는데, 위는 두 사람이 상을 놓고 둘러앉을 만하고 아래는 곧 깊디깊은 물결 속입니다. 죽음이 갑자기 찾아왔으니 그 왜적이 비록 용기와 힘이 있는 도적이라 한들 마음먹고 떨어지는 그 앙화를 어찌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 기록은 논개의 죽음이 있고 128년이 지난 뒤에 진주 사람들이 적은 것이다. 그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에서 근무하던 최진한(崔鎭漢)[1652~1740]이 비변사에 올린 장계(狀啓) 안에 실려 있다. 논개의 죽음이 유몽인의 기록에 견주어 한결 자세하게 그려졌다. “나라를 위하고 도적을 죽일 수 있는 계책을 떠올려” 그런 죽음을 택했다는 것과 왜장이 논개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까닭을 새롭게 밝혀놓았다. 무엇보다도 논개가 왜장을 꾀어내려고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하는 대목은 유몽인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이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논개의 죽음을 이야기할 적이면 이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 박태무(朴泰茂)[1677~1756]의 『의기전(義妓傳)』(1740)

“성이 무너져 다시 어찌 할 바가 없이 되자, 논개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 일이 이에 이르러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헛되이 죽어서는 도움이 없는데 어찌 구덩이에 빠져 죽기를 고집하겠는가?” 하면서 매무새를 꾸미고 고운 옷을 입고서 의암에 올라 거문고를 켜며 노래를 부르니, 왜장이 좋아라 하며 달려왔다. 드디어 반가운 듯이 맞이하여 함께 춤추다가 춤이 무르익자 적을 끌어안고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 기록은 윤적보 같은 진주 사람들의 것보다 20년이 뒤지고, 논개의 죽음에서는 147년쯤 지나서 적혔다. 여기서는 거문고를 켜고 노래를 부르는데다 새로이“반가운 듯이 맞이하여 함께 춤추다가 춤이 무르익자”적을 끌어안고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했다. 함께 춤추었다는 이 덧보탬 또한 뒷날 사람들이 거듭 되풀이하여 빠뜨리지 않는 화소가 되었다.

○ 안민영(安玟英)[1816~?]의 『금옥총부(金玉叢部)』(1881)

“논개와 함께 이 바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술이 반쯤 취하자 논개가 왜장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니 왜장은 기꺼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논개가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소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것은 박태무의 글보다 140년이나 더 뒤늦은 것이니까 논개의 죽음에서는 288년이나 지난 다음의 기록이다. 이제 여기서는“바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술이 반쯤 취하자”논개가 왜장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니 왜장은 기꺼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진주성싸움의 참혹함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논개와 왜장이 함께 어우러진 거기에만 마을을 쓰고 상상해나간 결과“술을 마시고 즐기는”데까지 왔다.

○ 사공수(司空燧)[1846~1925]의 『한양오백년가(漢陽五百年歌)』(1913)

“잇 마참 왜장드리 쵹셕루에 모여안 논의 인물 듯고 슐먹고 츔을 출”(이때 마침 왜장들이 촉석루에 모여 앉아 논개의 인물 듣고 술 먹고 춤을 출 적에)

이것은 안민영의 글보다 32년이 더 늦어서 논개의 죽음에서는 320년이나 지난 뒤의 기록이다. 여기서는 술을 먹고 춤을 추는 자리를 바위(의암) 위가 아니라 “왜장들이 모여 앉은 촉석루”로 바꾸었다. 왜장들이 모여 앉아 술을 먹고 춤을 추었으니 완전히 흥겨운 잔치를 벌인 것이 되었다. 이로부터 전라북도 유림에서 펴낸 『호남삼강록』(1903)과 통감부 시절 민간에서 펴낸 『초등대한역사』(1908)를 비롯하여 1950년대 뒤로 나타나는 여러 기록들이 이것을 받아들여 되풀이했다.

○장수교육청 ‘의암 주논개낭생장지 사적불망비(義巖朱論介娘生長地事蹟不忘碑)’(1960)

“계사년 유월 왜적이 침입하여 진주성이 무너져 여러 장수가 싸우다 죽으니 성 안이 물고기 회를 친 듯하였다. 칠월 칠일 촉석루와 남강 위에 왜적이 승전 잔치를 열자 논개는 의분이 끓어올라 스스로 기생처럼 꾸미고 왜장 입화종무가 몹시 취하여 미친 것 같음을 틈타 일을 꾀했다. 준비한 열 손가락의 반지와 가슴 가득한 열기로 남강 깊은 물에 치마를 둘러쓰고 떨어져서……”

이것은 논개의 죽음에서 367년이나 지난 다음의 기록인데, “칠월 칠일 촉석루와 남강 위에 왜적이 승전 잔치를 열자” 논개의 의분이 끓어올랐다고 했다. 이제는 잔치 자리가 촉석루와 남강 위에까지 벌어졌고, 날짜마저 한 주간이나 지난 칠월 칠석 명절로 바뀌었다. 그리고 장수지역에서는 이것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사실인 듯이 받아들이고 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