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신분]

진주 사람들의 굽힐 줄 모르는 아우성으로 관기 논개가 의기로 새남받아 세상에 우뚝 일어서자 뜻밖의 일들이 잇달아 벌어졌다. 첫손 꼽힐 일은 남편과 후손이 나타난 것이다. 논개의 신위가 의기사에 모셔지고 여섯 해를 지난 1746년 겨울 강물이 잦아진 남강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구리도장이 나타났다. 진주성이 떨어지던 그 날 촉석루에서 남강으로 뛰어내린 절도사 최경회[1532~1593]가 가슴에 품었던 것임을 짐작한 조정에서는 그의 충절을 새롭게 깨닫는 기회가 되어 그때까지 시호를 내리지 않은 것을 뉘우친 의정부에서 좌참찬(정2품) 권적(權樀)[1675~1755]에게 시장(諡狀 : 임금께 시호를 내려달라고 청하는 행장)을 쓰게 했다(1750). 권적의 시장 끄트머리에 “또 그의 천첩도 공이 죽던 날 아리따운 옷에다 매무새를 꾸미고 남강 가운데 바위에서 적장을 꾀어 끌어안고 함께 떨어져 죽었다. 이제까지도 사람들이 그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니 또한 맵다[烈] 하지 않으랴.” 하였다. 의기사에 모셔지고 꼭 십년이 지난 때에 최경회 절도사가 논개의 남편으로 나타난 셈이다. 이것은 시장의 자료를 뒷받침한 최경회의 현손(손자의 손자) 최급(崔汲)에게서 말미암았음에 틀림없겠고, 157년 동안 진주에서 그처럼 찾아도 없던 자손이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 알 길 없지만, 임금께 올린 의정부의 기록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호남 유림이 펴낸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1799), 장수현감 정주석(鄭冑錫)이 세운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1846),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교방가보(敎坊歌譜)』(1872), 장수현의 『장수현읍지(長水縣邑誌)』(1872), 전라북도 유림의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1903),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충의공신도비명(忠毅公神道碑銘)』 같은 데에서 거듭 되풀이하여 최경회 절도사를 논개의 남편으로 못박았다. 그리고 20세기에 나타난 여러 기록들은 거의가 그대로 뒤집을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논개가 최경회와 그런 연분을 맺을 수 있는 말미가 쉽게 잡히지 않아서 그랬던지 장지연(張志淵)[1864~1920]은 『일사유사(逸士遺事)』(1922)에서 최경회와 함께 계사년 진주성에서 순국한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1593]을 논개의 남편이라 했다. 그러자 박종화(朴鍾和)[1901~1981]의 「논개와 계월향」(1946), 정한숙(鄭漢淑)[1922~1979]의 「논개」(1973) 같은 소설에서도 절도사 황진을 논개의 남편으로 받아들였다.

아무튼 논개가 다락같이 높은 사대부의 아내로 떠오르자 사람들은 이제 논개를 기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논개의 신분은 『어우야담』(1621)부터 ‘진주 관기’였고, 최진한의 장계를 받아들인 경종의 교지(1722)에서 ‘의기’로 바뀌었으나, 남편 최경회에게는 언제나 ‘천첩’(권적의 「시장」, 1750), ‘소방(=작은 방. 정현석의 『교방가보』, 1872), ‘첩’(송변선의 『충의공신도비명』, 1903)일 뿐이었다. 그런데 장지연이 『일사유사』(1922)에서 “양갓집 딸이니 재주와 인물이 빼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집이 가난하고 의지할 데가 없어 마침내 기녀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데로 떨어졌다.” 하자, 무엇보다도 20세기의 모든 소설과 평전 같은 문학작품들이 이것을 되풀이하며 허구로 사실과 사건들을 만들어나갔다.

[논개의 고향]

남편과 후손이 나타나고 신분까지 드높아지니 고향도 나타나고 마침내 무덤까지 나타났다. 논개의 고향을 맨 먼저 내세운 기록은 『호남절의록』(1799)의 「충의공최일휴당사실(忠毅公崔日休堂事實)」 끝자락이다. “기녀 논개는 장수 사람인데 공(최경회)이 좋아했으므로 따라서 진주에 들어갔다.” 이렇게 논개를 장수 사람이라 하자, 장수현감 정주석은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웠다(1846). 『장수지(長水誌)』(1925)와 『조선호남지(朝鮮湖南誌)』(1953)에서는‘임현내 풍천’이라 했으나, 정비석의 「진주기 논개」(1982)에서 풍천을 ‘계내면 월강리 풍천마을’이라 했다. 그런데 박종화의 「논개와 계월향」(1946)에서는‘장수면 연사리’, 진주의 의기창렬회가 세운 ‘의랑 논개의 비’(1954) 뒤쪽 「논개의 사연」에는 ‘내계면 대곡 주촌리’, 장수교육감의 ‘의암주논개랑생장지사적불망비’(1960)에는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장수향교에서 펴낸 『벽계승람(碧溪勝覽)』(1975)에는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전병순의 『논개』(1979)에서는 ‘계내면 대곡리 궐촌마을’이라 하여 조금씩 엇갈렸다. 그러다가 1980년대로 넘어와 지방자치시대를 맞으면서 전라북도와 장수군이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을 논개의 고향으로 확정하고 나랏돈까지 받아서 굉장한 사적지로 꾸미고 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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